부인의 묘 뒤에 안치된 남편의 묘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 방간 회안대군(懷安大君)의 묘

작성일 : 2022-01-19 21:04 수정일 : 2022-01-20 08:46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산 59-5 번지인 산정동 마을 뒷산에는 세간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인의 묘가 앞에 있고 그 뒤에 남편의 묘가 있는 묘소가 있다. 그것도 태조 이성계의 아들 방간인 회안대군의 묘가 그렇다.

 

어찌 보면 이상할 것 같지만 사실은 맞게 쓴 묘다.

묘는 산의 주봉을 따라 산줄기가 내려오면서 선대일수록 위쪽에 쓴다. 아버지의 묘가 위이고 아들의 묘가 아래다. 남편의 묘가 위이고 아내의 묘가 아래다.

회안대군의 묘와 부인의 묘는 옆으로 나란히 있지 않고 앞뒤로 나란히 있다. 그곳은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평지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사산 주봉 쪽으로 회안대군 묘가 뒤에 있고 부인의 묘가 앞으로 온 것이다. 앞뒤가 아니라 위아래로 보면 맞다.

 

 

회안대군(懷安大君)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안변 한 씨의 넷째 아들로 이름은 방간(芳幹)이고 호는 망우당(忘牛堂)이며 시호는 양희(良僖)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 및 정도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그러나 이방원과 세자 자리를 두고 박포의 이간에 휘말려 이방원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그 후 아들 의령군 맹중과 함께 황해도 토산현으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안산, 전라도 익산, 순천성, 전주부 완산 등지로 유배지를 옮겨 다녔다. 태종 재위 시절 몇 차례 회안대군에 대한 치죄(治罪)가 논의되었으나 태종이 거부하여 별다른 제죄를 받지는 않았다.

 

그 후 그는 자진하여 본관지인 전주로 내려가 전주부 동용진면으로 가서 20년간을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한양으로 올라가던 중 세종 3년인 1421년 4월에 홍주에서 병사하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전주부 금상동 법사산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회안대군이 묻혀 있는 묘 자리는 호남정맥 만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묵방산을 이루고 두리봉을 지나 무명봉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각각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명당자리다.

 

회안대군이 묻혀 있는 자리는 군왕이 나올 명당자리라 하여 산줄기에  뜸을 떠서 땅의 기운을 끊었다 한다.

지금도 산허리에 파놓은 구멍들이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뜸터”라고 부른다.

 

회안대군이 유배생활을 하던 봉동의 우형산 아래 천내마을에는 방간이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두었는데 싹이나 거목으로 자랐다는 버드나무가 있는 곳이다.

그때 방간이 심었던 버드나무는 고목이 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후계목이 보호수가 되어 자라고 있다.

 

회안대군이 유배하던 천내마을은 주변에 비봉, 봉상, 봉서, 봉실산 등이 있고 건너편에는 천호산, 용화산, 미륵산 등 왕을 상징하는 지명들이 많다. 이러한 이유는 회안대군이 이곳에서 재기를 꿈꾸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회안대군은 재기를 꿈꾸어 심종 등과 연락하여 거사를 계획했지만 실패하였다는 말도 있다.

 

회안대군 부부의 묘는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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