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유토피아를 노래했던 부안 출신 목가시인 신석정

그 먼 나라는 어디인가

작성일 : 2021-08-16 01:55 수정일 : 2021-08-16 10:43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시인 신석정을 말할 때에 연상되는 풍경 있다.

그의 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 나오는 풍경이 바로 그곳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세파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쉴 수 있는 곳, 어찌 보면 한국인의 유토피아라 할 풍경을 노래한 사람이 목가시인 신석정이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를 끼고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시인 신석정은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전원 속에 묻혀 농작물을 가꾸면서 문학 작품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다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0년 박헌영이 주재하던 조선불교중앙강원에 들어가 불전을 공부하였다. 그때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 『원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시 쓰기에 힘썼다.

 

그 후 잠시 서울에 올라가 시인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시문학』에 시 「선물」을, 『동광』에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하며, 이를 계기로 정지용, 이광수, 한용운 등과도 교우하게 되었다.

 

 

목가 시인이 된 신석정

 

잠시 동안의 서울 생활이 몸에 맞지 않았던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읍 변두리에 뜰이 넓은 초가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석정은 고향에서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시를 쓰면서 전원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문예월간』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삼천리』에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실을 지킬 수 있읍니까」 등을 발표하였다.

그 뒤 1936년에 『신동아』에 「돌」, 『중앙』에 「송하논고(松下論告)」, 『조선문학』에 「눈 오는 밤」을 발표하고 1939년에는 『조선문학』에 「월견초(月見草) 필 무렵」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시작활동을 이어갔다.

 

첫 시집 『촛불』

 

『촛불』은 1939년에 첫 시집으로 내놓은 작품집이다.

가로 130mm, 세로 185mm의 청색 바탕에 꽃 한 송이 그려진 단순한 표지 도안에 요즘에 나온 시집처럼 ‘발간사’나 ‘저자의 변’ 같은 작가의 글이나 서평 없이 96쪽의 얇은 책으로 순수한 작품만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는 38편의 작품을 은행잎, 촛불, 난초 등 세 단락으로 나누어 실었다. 맨 앞에 놓인 작품이 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임께서 부르시면」이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부분-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도 첫 시집 촛불처럼 청색바탕에 꽃이 그려진 표지에 32편의 시를 실었다. 이 시집 역시 저자의 말이나 서평 없이 작품만 실었는데 87쪽의 얇은 책으로 엮었다. 이 시집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목가시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일제에 맞섰던 저항시인

 

그는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그러한 일로 일제는 그의 시를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문장』에 게재될 예정이던 시를 싣지 못하게 하고 『문장』을 강제 폐간시키기까지 하였다. 그 후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왔는데 그는 청탁서를 찢어버리고 작품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절필을 선언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가 두 번째로 내놓은 시집 『슬픈 목가』는 해방이 되고 난 1947년에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삭이면서 눈을 전원에 돌리고 있던 그때의 심정을 슬픈 목가에 쏟아 놓은 것이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댓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도 젖어 왼 몸이 젖어······

 

                                              <중략>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인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부분-


 

슬픈 목가에 실린 이 시는 당시의 그의 심정을 나타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던 참담했던 속마음을 시 속에 담았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방 후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친일파로 곤혹을 치를 때에도 떳떳했으며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인제 입춘 철이 오면

동백이 빠꼼히

입을 열고 웃는 날

 

아 아,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 「작은 기원」 부분-

 

 

해방은 되었어도 그가 바라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도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싸움과 혼란으로 기대가 무너진다. 해방 후에도 그는 고향에 남아 활동하면서 1946년 『신문예』에 「비의 서정시」를, 1947년 『신천지』에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 제3시집 「빙하」, 제4시집 「산의 서곡」, 제5시집 「대바람 소리」를 발간하면서 시작 활동을 지속하였다.

 

 

말년의 신석정

 

그는 전주 노송동의 고택에서 그가 좋아하는 태산목과 동백꽃을 보면서 꽃나무와 풀꽃들이 가득한 곳에서 살았다. 그 집은 지금도 여러 시인들이 신석정 시인을 생각하며 자주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그는 문득 동백꽃이 보고 싶으면 새벽에 전주역으로 나가 여수행 기차를 타고 오동도에 가서 동백꽃을 보고 오곤 하였다.

 

1973년 12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상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7월 6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그 후 유고집으로 수필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발간되었다.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 「작은 짐승」 부분-

 

란이는 시인 신석정의 딸 이름이다. 신석정은 시의 여러 곳에 란이를 등장시켰다. 어린 아이인 란이는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그 먼 나라도 란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건장한 체구에 너털웃음을 날리며 파이프를 문 시인 신석정 지금도 그 먼 나라에서 어머니와 함께 비둘기와 어린양을 기르며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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