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왕궁길, 물왕멀로를 걸으며

있는 힘 다 써보지 못한 견훤의 한 서린 터

작성일 : 2022-02-08 08:57 수정일 : 2022-02-08 10:21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전주시 동쪽 지역 언덕을 이루고 있는 물왕멀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왕궁터로 삼았던 터다.

 

물왕멀은 전주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승암산에서 기린봉을 거쳐 시내를 향해 벋어 내려오던 산줄기가 마당재를 거쳐 시내 중심을 향하여 기운을 벋어가다가 잠시 멈춘 지점에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견훤로가 지나가고 견훤왕궁로도 지나간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깎기고 파여 산의 형체가 일그러졌지만 무언가 상서로운 기운이 있었기에 이곳을 왕궁터로 삼았을 것이다.

 

현재 전주동초등학교와 신일중학교가 서 있는 뒷산 물왕멀 언덕은 옛날의 영화가 사라진 쓸쓸하기 그지없는 폐허의 공터로 남아 있다. 이곳에서 시내를 바라보면 사라진 꿈처럼 시내가 멀리 아스름하다.

물왕멀 골목 담벼락 벽화에는 견훤에 대한 안내가 그림과 함께 장황하게 쓰여 있다.

 

  물왕멀 담벼락에 그려진 견훤에 대한 글과 벽화

 

견훤(甄萱)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호랑이의 기상을 가진 사람으로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사람이었다.

견훤에게도 나라를 건국한 영웅에게 따라다니는 탄생에 대한 설화가 있다. 그것은 지렁이의 피를 받은 사람이며 어린아이 때에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것이다.

커갈수록 풍모와 기개가 남달랐던 견훤은 성(姓)이 본래 이(李)씨인데 15세 때 스스로 견(甄) 씨로 고칠 만큼 당찬 사람이었다.

 

그는 군인이 되어 신라 서남쪽 지방의 방어를 맡아 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의 자리에 올랐다. 견훤은 신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로 전라도 지역의 농민들이었다. 견훤은 그 지방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가며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마침내 견훤은 진성왕 6년인 892년에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武珍州)를 공격해 점령하면서 나라를 세울 기반을 다졌다.

 

견훤은 전주에 와서 그곳의 사람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고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이때가 효공왕 4년인 서기 900년이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 것보다 1년이 앞선 해였다.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고 한 이유는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고 호응을 얻기 위함이었다.

 

견훤은 효공왕 5년인 901년에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는 등 신라의 영토를 침입하며 위협을 가했다. 궁예가 세력을 확장하며 신라의 영토를 잠식할 동안 견훤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여 후삼국 시대를 만들었다.

이후 고려와 후백제는 자주 무력 충돌을 벌였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화친을 맺기도 하면서 자웅을 겨루었다.

 

마침내 견훤은 신라를 징벌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도읍인 경주를 쳐들어갔다. 나라의 위급함에도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던 경애왕을 죽이고 신라 왕족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다는 소식에 불안해진 왕건은 군사를 몰고 후백제로 돌아가는 견훤의 부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왕건의 부대를 크게 물리쳤다. 왕건은 여기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달아날 정도였다.

 

견훤은 그 여세를 몰아 신라의 대목군(大木郡)을 비롯한 경상도 일부 지역을 공격해 차지하고 나주 지역과 충청도 지역 일부를 차지하면서 세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태조 13년인 930년에 벌어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가 지방 호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견훤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거기에다 불안을 느낀 경상도와 동해안 지역 140여 개의 성들이 왕건에게 귀부(歸附)했다. 이를 계기로 왕건은 경상도 일대에서 견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태조 17인 934년에 벌어진 운주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세력이 약해졌고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부했다. 이때부터 후백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거기에다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경순왕마저 고려에 투항해 버리고 견훤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후백제의 세력이 약화되어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견훤은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했던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큰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어버렸다.

견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왕건에게 몸을 위탁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왕건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은 후백제는 태조 19년인 936년에 망함으로써 36년 동안의 역사를 마치게 되었다.  

 

한때 호랑이의 기백으로 천하를 호령하던 견훤은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한 채 패장이 되어 쓸쓸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물왕멀은 한때 후백제의 궁궐 터였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쓸쓸한 동네가 되어 이곳이 왕궁 터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게 한다.  

 

승암산을 거쳐 기린봉을 넘어 마당재로 내려온 산줄기는 물왕멀에서 잠시 멈춘 후 덕진으로 나아가 건지산에 이른다. 물왕멀에서 정기를 제대로 내뿜지 못했던 기운이 건지산에 이르러 조선을 건국하게 만든 것이다. 

견훤이 조금만 신중하여 토족들의 호응을 얻고 후계자를 처음부터 큰아들로 정하고 요지부동하였더라면 상당기간 세력을 떨쳤을 것이다. 어쩌면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호남평야의 풍부한 물산이 뒷받침 되어 부국강병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견훤에게 묻고 싶다.

왕이여!  정말로 왕위를 첫째 아들 신검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였는가? 아직은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어쩌자고 그런 말을 발설하여 화를 자초하고 말았는가? 

 

36년은 너무 짧다. 

360년쯤 갔더라면 전주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의 물왕멀은 궁궐이 들어서고 수많은 부속 건물이 들어서 사방이 유적지가 되었을 것이다. 동고산성과 동고사 주변의 궁궐도 우람하게 지어졌을 것이다. 호남평야에서 나는 물산을 실어나르는 길도 넓게 닦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권자가 무너지면서 왕궁의 꿈도 함께 무너져버린 물왕멀은 그후 도시개발에 밀려 낙후된 지역이 되고 말았다.

견훤의 못다한 꿈을 달래기 위함이었을까? 물왕멀 주변에는 동국사, 미륵사, 성불암 등 작은 절과 암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꿈이여 다시 한번을 되뇌어보는 것은 나만의 중얼거림이 아닐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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