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최초의 양옥, 마로덕 선교사 부부 사택

강당재 옛길에 남아 있는 기독교 사적지 제29호

작성일 : 2022-03-04 20:19 수정일 : 2022-03-05 08:54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지금의 예수병원이 들어서 있는 도로인 서원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중화산동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높고 꼬불꼬불한 강당재였다. 강당재는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고개에는 예전의 예수병원이었던 엠마오 사랑병원이 있다. 그리고 엠마오 사랑병원 입구 맞은 편에 오래된 작은 양옥집이 한 채 있다. 거기 입구의 큰 나무 옆에 “마로덕 선교사 기념관”이라는 안내석이 서 있다.

 

이곳이 1902년 미국 남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병을 받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벌였던 마로덕 선교사 부부가 살던 사택이다.

그리고 이 작은 건물이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사적 제29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마로덕 선교사는 1873년 미국 비숍 빌에서 출생하여 사우스캐롤라이나 장로교 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유니온 신학대학원까지 마친 뒤 1902년 서울에 도착하여 군산과 목포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준비를 단단히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북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무주, 장수, 금산, 익산, 삼례, 고산, 그리고 임실, 남원 등 동부와 남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1908년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사 요셉 빈과 결혼을 한 후 부인과 같이 다시 한국으로 건너와 전도에 힘썼다.

 

1021년부터 1940년까지 전주성경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그가 운영하였던 성경학교가 지금의 신흥중‧고등학교 건너편에 있었다. 마로덕 선교사는 교회의 사경회를 성경학교로 확대시켜 농한기 때 성경을 가르쳤다.

1921년에는 남자를 위한 전주성경학원을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여 기독교 보급과 사회 계몽 요원으로 활용하였다.

그의 부인 마요셉 빈은 전주여자성경학교를 만들어 여성교육에 힘썼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일제는 다가산 정상에 신사를 짓고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도록 하고 학교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하도록 강권하였다. 기독교 신자였던 마로덕 선교사가 이에 따를 리 만무하였다.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모두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1940년에 두 사람을 강제로 추방을 하여 한국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서도 하와이에서 한국인 이주노동자를 보살피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한국인 전쟁포로회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한국을 위해 일하다가 1960년 8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마로덕 선교사 기년관"은 현재 “전주생동하는 교회”로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문화 과학센터를 겸하고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마당에 마로덕 선교사 사택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고 거기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건물은 한국기독교 사적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국 남장로회 파송 선교사 마로덕(1873~1960) 선교사가 1910년경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집(洋館)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예수병원 소속 의료 선교사들이, 이후에는 농촌 선교에 헌신한 배치수, 심득민 목사, 학원선교에 헌신한 한미성 교수와 이거보 목사 등이 거주하였다."

 

마로덕 목사는 1903년부터 교회 지도자 양성과 복음 전도에 주력하여 80여 교회를 설립하여 성경공부를 시키고 지도자를 길러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일제는 1940년 이들을 강제로 추방을 한 것이다.

마로덕 목사님은 한국에서 추방된 후에는 하와이에서 살면서 평생을 한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마로덕 선교사 기념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안에는 “생동하는 교회” 예배실로 쓰고 있고 복도에 마로덕 선교사에 대한 게시물이 전시되어 있다.

 

 

선교사 마로덕 목사의 약력판과 부인 마요셉 빈 선교사의 약력판이 있고 이승철 집사가 지은 마로덕 선교사의 한국 이름인 마로덕(馬路德) 목사에 대한 찬양 시가 걸려 있다.

 

7언 시로 된 이 시는 한자와 한글로 적혀 있고 아래에 번역이 되어 있다.

 

어찌하여 마로덕 이름이더냐

포교 길 말 재촉 다닌 덕이냐

 머나먼 길 바다 건너 여기에 와

삼십 총각 전주에 몸을 맡겼네.

예수 복음 천지를 뒤흔드니

유생 학자 묘 속에서 뛰어나와도

밝은 종교 모인 민중 받아들였으니

호남의 목자들 오래 떠받들리라.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까지 마친 인텔리어가 산 설고 물 설은 머나먼 미지의 나라 한국의 전북에 와서 전북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펼쳤으니 우리 전북 사람으로서는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일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우민정책을 펼쳐서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잘 살 수 있다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한국인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심어주고 한국인들의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힘썼던 마로덕 선교사는 눈에 가시였으리라. 끝내는 강제로 쫓아내고 말았다.

 

마로덕 선교사가 좀 더 오래 전북에 남아 있었더라면 전북 인들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빨리 근대문명에 접근했을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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