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그래서 승자의 기록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그러나 백제의 멸망에 대해서만큼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1.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 멸망의 원인
삼국사기는 비록 고려시대에 쓰인 책이지만 김부식이 신라의 무열왕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역시 무열왕 혈통의 사람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멸망 원인으로 의자왕이 사치와 음란과 향락과 충신 탄압으로 정세 판단이 부족한 인물이어서 멸망했다고 몰아가고 있다.
또 하나는 신라가 백제 침공 원인을 사비성에 해괴한 괴변이 나타나서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침공했다고 기록했다. 해괴한 괴담을 없애는데 신라 군사 5만을 두고도 당나라 군사 13만 명을 합하여 18만이 필요했을까? 백제와 신라의 국세가 비슷하다 할 때 백제로서는 18만은 벅차다. 중과부적이다.
신라는 백제의 잦은 침략에 위기를 느꼈다. 백제가 멸망하던 전해인 659년에도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다. 당시에 신라는 화랑제도가 융성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군사력으로는 백제를 견제할 수가 없을 만큼 백제의 군사력이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인 것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했음을 알고 백제 침략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 주기 위하여 그와 같은 기록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백제 멸망 후에 세워진 승전 기념탑인 5층석탑
2. 백제의 최후에 대한 기록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가 황산벌 싸움에서 패전하자 순식간에 무너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연안 이씨 선조 기록 중, 시조인 이무(李茂)의 기록을 보면 소정방과 함께 백제 원정대를 끌고 온 중랑장 이무 장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 소정방이 총괄 지휘하고 김유신은 2만의 군사로 사비성 남문을, 이무 장군은 1만으로 북문을, 김인문은 1만으로 서문을, 풍사귀는 1만으로 동문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다. 사비성 공격에 5만의 군사가 동원된 것이다.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다 전사했는데 사비성 공격에 5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필요했을까? 당시에 백제의 군사력도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신한다.
그런데 신라군이나 당나라군이 공산성을 바로 공격하지 못했다. 사비성 전투에서 많은 손실이 있었기 때문에 보강할 여유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백재 의자왕이 피신했던 공주의 공산성
3.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이유
같은 삼국사기 무열왕조에서 백제가 멸망하기 전해인 659년에 신라는 백제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에 불안한 왕이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초조하게 파병 소식을 기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백제의 잦은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당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정림사지 석탑의 대당평제국비문에는 당나라에서는 파병 이유로 백제가 같은 동족인 신라를 자주 침범하여 중국의 밝은 조칙을 어겼는데 이를 징벌하기 위해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4. 왜곡된 전설들
정사라고 하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가 망하게 된 원인은 백제의 사비성에 해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는 귀신잡설을 들먹인다.
백제가 멸망하던 전해인 의자왕 19년, 659년에는 여우 떼가 궁중에 들어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고, 길이가 세 발이나 되는 큰 물고기가 죽었으며, 키가 18척이나 되는 여자 시체가 떠올랐으며,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를 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에서 귀신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백제의 한을 안고 있는 낙화암과 백마강
다음 해인 의자왕 20년,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에는 사비성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사비하의 물이 핏빛으로 붉었다고 했다. 사비성의 모든 개가 노상에 나와 짖었고 귀신이 대궐 안에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고 외치다가 땅속으로 들어 갔는데 땅을 파보니 ‘백제는 둥근달이고 신라는 초승달이다’라는 글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하나 전설은 백제를 지켜주던 백마강 용이 소정방의 낚싯대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조룡대에서 백마강 용이 소정방 앞에서 꿇어앉았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것이 조선시대 발간된 신국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소정방이 백마고기로 용을 낚았다고 덧붙였다.
삼천궁녀는 삼국사기에도 없는 이야기를 후세에 지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