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공원은 완산칠봉에서 벋어 나온 한 줄기다. 그것을 일제 강점기 때에 완산칠봉 용두봉의 용의 목을 잘라 길을 내고 이쪽을 화산이라 따로 이름을 짓고 다가산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시내에서 잘 보이는 곳에 신사를 짓고 전주 사람들에게 신사 참배를 하도록 강요하였던 곳이다.
시내 쪽에서 다가공원을 가려면 다가교를 건너 활터인 천양정을 걸어가다 보면 큰 길 옆에 작은 길이 하나 있다. 좁은 계단이 있는 길인데 그 출발점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참궁로(參宮路)
지금은 그저 묵묵히 전주 시내를 굽어보고 있지만 전주 사람들에게 다가산은 눈물 같은 공원이다. 일제 강점기에 다가산 정상에 세워진 신사를 참배하기 위해 닦아놓은 이 길을 참궁로라 하였다. 즉, 신사에 참배하러 가는 길이라는 의미인데 다가교를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라는 의미의 대궁교(大宮僑)라는 이름을 지은 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참궁로를 따라 한 발 한발 걸어 올라가 본다. 지금이야 이 길을 따라 올라가 다가공원 정상에 서서 전주 시내를 바라보며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힐링의 장소가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이 길은 전주 시민들과 학생들이 강제로 천황에 참배하기 위해 걸어가던 수치스러운 신사 참배의 길이다.
지금은 위세도 당당하게 두 개의 탑이 솟아 있다. '호국의열탑'과 '호국지사충렬탑'이다. 두 개의 탑이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호국열사에 대한 충렬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울타리 둘레 한쪽에 작은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거기 이렇게 쓰여 있다.
“아픈 역사의 흔적, 신사터.
일제 강점기이던 1914년 10월,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서문 밖에서 잘 조망할 수 있는 다가공원 정상에 신사가 건립되었다. 이는 기만적인 내선일체와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11,800평의 땅을 강제로 기부 받아 완공하였다. 1935년 이후 조선 백성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당시 심사 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1937년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이 작은 표지판 하나 속에 얼마나 많은 아픈 이야기들이 감추어져 있을까? 나라를 침범한 원수의 나라 천왕을 위하여 신사 참배를 하러 참궁로를 걸어 올라오면서 얼마나 한스럽고 가슴 아팠을까?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강요와 핍박이 있었을까?
다가공원 아래 마당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일했던 애국지사들의 비석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영화를 버리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사람들이다.
‘6‧25 반공순국동지충혼비’를 비롯하여 미 수석고문이었던 라꾸엘 중령 공훈 기념비, 경찰국장 이순구 기념비, 차영민 여사 순국비, 효산 이광열 선생 기적비, 춘산 김성용 선생 추모비, 지재 정태선 기적비 외에 26기의 불망비와 선정비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 다가산 위에 우뚝 솟아 있었을 신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둘레에는 수령 340년 된 보호수 고유번호 9-1-6로 지정된 느티나무와 120년 된 노거수 느티나무도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활터인 천양정이 있어 한량들의 활 솜씨를 겨루어 볼 수도 있다. 이 천양정 활터는 1995년부터 풍남제의 행사와 병행하여 조선시대의 무과 급제 시험을 재현하여 조성한 것이다. 활터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가락인 시조의 거두인 가람 이병기 선생 시비도 있다. 이 시비는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진 시비다.
예나 지금이나 위인이나 영웅은 자신의 영달을 버리고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많은 일을 하였으되 자신의 욕심을 부리면 독재자가 되어 비난을 받는다.
다가공원의 애국의 길과 참궁로를 함께 걸으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만의 욕심을 위하는 일인가, 여러 사람들을 위하는 일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