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사람의 천사가 살았던 노송동의 비사벌초사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던 신석정 시인의 거주지

작성일 : 2022-03-24 23:19 수정일 : 2022-03-25 09:27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전주시 노송동의 천사마을에는 또 한 사람의 천사가 살고 있었다.

해마다 수백만 원씩의 성금을 기탁하여 불우한 이웃을 도와온 기부천사 못지않게 수백만 명의 아프고 서러운 마음을 달래주었던 사람.

그는 시인 신석정이다. 그리고 그가 살던 집이 비사벌초사로 ‘전주미래유산 14호(신석정 가옥)로 지정되어 있다.

 

신석정 시인이 비사벌초사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70년 전인 1952년, 신석정 시인의 나이 46세 때였다. 그는 부안 고향에서 부안중학교와 죽산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전주고등학교로 옮겨오면서 전주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부터 살기 시작한 집이 지금의 비사벌초사인 것이다.

그 집에는 시인이 좋아하는 동백나무와 태산목이 여러 그루 마당에 서 있었고 갖가지 나무와 화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전주고등학교에서 7년간을 국어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 후 전주상업고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직을 했는데 비사벌초사는 전주고등학교와 전주상업고등학교의 중간지점에 있는 곳이었다.

 

신석정 시인이 부안에서 전주로 옮겨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노송동의 집이 그가 이름 붙였던 비사벌초사로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이 부근을 택지로 개발하고자 하는 건설업자가 비사벌 초사만 남겨놓을 수 없다며 헐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사벌초사를 지키기 위하여 전북의 많은 문인들이 나서서 활동을 한 결과 오랜 협의 끝에 시인이 거주하던 비사벌초사는 헐지 않고 남겨놓기로 하였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비사벌초사 부근 골목으로 접어들면 마을의 담벼락에 시인의 시가 쓰여 있다. 거기에는 「임께서 부르시면」, 「오월이 오면」, 「대바람 소리」 등의 시인의 시가 시화 판으로 그려져 있다.

대문 앞에 이르면 “신석정 시인의 고택, 비사벌초사, 전주미래유산 14호”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시인의 생애가 안내되어 있다.

 

신석정 시인은 1907년 칠월 칠석 날에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에서 신기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시인 신석정은 고향인 전북 부안에서 전원 속에 묻혀 농작물을 가꾸면서 문학 작품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다가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0년 박헌영이 주재하던 조선불교중앙강원에 들어가 불전을 공부하였다. 그때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 『원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시 쓰기에 힘썼다.

 

그 후 잠시 서울에 올라가 시인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시문학』에 시 「선물」을, 『동광』에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하며, 이를 계기로 정지용, 이광수, 한용운 등과도 교우하게 되었다.

 

잠시 동안의 서울 생활이 몸에 맞지 않았던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부안읍 변두리에 뜰이 넓은 초가를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 거주하면서 시를 썼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석정은 고향에서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시를 쓰면서 전원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문예월간』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삼천리』에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실을 지킬 수 있읍니까」 등을 발표하였다.

그 뒤 1936년에 『신동아』에 「돌」, 『중앙』에 「송하논고(松下論告)」, 『조선문학』에 「눈 오는 밤」을 발표하고 1939년에는 『조선문학』에 「월견초(月見草) 필 무렵」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시작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첫 시집 『촛불』은 1939년에 내놓은 작품집이다.

요즘에 나온 시집처럼 ‘발간사’나 ‘저자의 변’ 같은 작가의 글이나 서평 없이 96쪽의 얇은 책으로 순수한 작품만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는 38편의 작품을 은행잎, 촛불, 난초 등 세 단락으로 나누어 실었다. 맨 앞에 놓인 작품이 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임께서 부르시면」이다.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도 첫 시집 촛불처럼 청색 바탕에 꽃이 그려진 표지에 32편의 시를 실었다. 이 시집 역시 저자의 말이나 서평 없이 작품만 실었는데 87쪽의 얇은 책으로 엮었다. 이 시집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목가시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을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그러한 일로 일제는 그의 시를 검열하기 시작하였다. 『문장』에 게재될 예정이던 시를 싣지 못하게 하고 『문장』을 강제 폐간시키기까지 하였다. 그 후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에서 원고 청탁이 왔는데 그는 청탁서를 찢어버리고 작품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절필을 선언하고 해방이 될 때까지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가 두 번째로 내놓은 시집 『슬픈 목가』는 해방이 되고 난 1947년에 나왔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삭이면서 눈을 전원에 돌리고 있던 그때의 심정을 슬픈 목가에 쏟아 놓은 것이다.

 

슬픈 목가에 실린 시는 당시의 그의 심정을 나타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던 참담했던 속마음을 시 속에 담았다. 이러한 그의 지조는 해방 후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친일파로 곤혹을 치를 때에도 떳떳했으며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작가로 남게 되었다.

 

해방은 되었어도 그가 바라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도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싸움과 혼란으로 기대가 무너진다. 해방 후에도 그는 고향에 남아 활동하면서 1946년 『신문예』에 「비의 서정시」를, 1947년 『신천지』에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 제3시집 『빙하』, 제4시집 『산의 서곡』, 제5시집 『대바람 소리』를 발간하면서 시작 활동을 지속하였다. 

 

말년에 그는 전주 노송동의 고택에서 그가 좋아하는 태산목과 동백꽃을 보면서 꽃나무와 풀꽃들이 가득한 곳에서 살았다. 그 집은 지금도 여러 시인들이 신석정 시인을 생각하며 자주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그는 문득 동백꽃이 보고 싶으면 새벽에 전주역으로 나가 여수행 기차를 타고 오동도에 가서 동백꽃을 보고 오곤 하였다고 한다.

 

1973년 12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상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인 1974년 7월 6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유고집으로 수필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발간되었다.

 

신석정 시인의 처음 장지는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 앞산이었다. 그 후 2000년 3월에 부안군 행안면 역리 서옥부락 고성산 선영하에 다시 묻히게 되었다.

 

필자도 전주상고 1학년 입학하던 해 4월에 교내 백일장이 열렸는데 신석정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오라 하시더니 네가 산문부 장원을 하였다고 칭찬을 해주시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배가 고파도 굽히지 말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저는 은행에 취직을 해서 가난을 면해보렵니다’ 라는 반발심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에 따랐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 말씀을 새겨듣지 못해 절름발이 글쟁이가 되어버렸다.

 

임께서 부르시면 그렇게 가겠다 하시더니 어느 님이 부르셨기에 그렇게 훌쩍 떠나가서 소식이 없을까? 시인은 가셨지만 시인의 슬하에서 문학 공부를 하던 수많은 문하생들의 가슴속에서 그는 지금도 살아 계시는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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