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마리의 말을 숨겨두었던 만마관을 찾아서

지금 완주의 남관과 상관의 유래

작성일 : 2022-04-01 06:31 수정일 : 2022-04-01 09:01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전주에서 남원까지 벋어 있는 춘향로를 달리다보면 중간에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한다.

그 고개가 슬치다. 지금도 슬치를 넘어가면 기후가 달라진다. 겨울철에는 전주에서는 비가 오는데 슬치를 넘어서서 임실 땅에 닿으면 눈이 내린다. 그만큼 높은 지대다.

 

슬치를 넘기 전에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만마관(萬馬關)에 대한 안내판이다. 그런데 개울 건너 산 밑에 이상한 네모 박스가 하나 같이 있다. 저것도 만마관과 관련이 있는 시설인가 의심이 간다.

이럴 때 필요한 사람이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공교롭게도 임실 관촌 방수리에서 전주 시민들을 위한 수돗물 공급을 위해 뚫어 놓은 터널 보호시설이란다.

그리고 남관초등학교 길 건너 맞은편에 남관진에 대한 안내판이 서 있는데 여기에는 비까지 서 있다.

 

진(鎭)이란 진영(鎭營)의 준 말로 국가를 방비하기 위한 국경이나 지역을 방비하기 위한 지방의 경계 지점에 두었던 군대를 말한다.

남관진은 전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남관에 설치했던 진인 것이다.

만마관은 만 마리의 말을 숨겨놓을 만한 중요한 지점을 뜻한다. 남쪽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관문인데다 계곡이 협소해서 방어하기에 좋은 지점이었다.

 

만마관은 조선시대 순조 11년인 1811년에 전주부 만마관에 축조된 관방이다. 관방이란 국경이나 지방 경계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진(鎭)이나 영(營), 보(堡), 책(柵) 등 군사적인 시설을 말한다.

 

전라감사 이상황이 전주부의 만마동은 예로부터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뜻하는 것처럼 1만 마리의 말을 감추어 두고 지킬 만큼 주요한 지점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며 이곳 지형을 이용해 성을 쌓아야 한다고 장계를 올려 만마동 남쪽에 만마관을 만들게 되었다.

여지도 “남고진 사례”에 따르면 만마관은 남고진에서 동쪽(실제로는 남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남관진에서 5리)에 있으며 성의 문 위에 지은 다락인 문루가 6칸이고 물고기 비늘 모양의 철제 장식이 달린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반원이 되게 만든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05년과 1907년에 서 있었던 만마관의 모습

 

성곽을 포함한 총 길이가 230m이고 성벽 위에 쌓은 담장인 여장이 78좌이며 세 칸 규모의 수문장졸 수직방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마관은 전주부성인 남고산성의 속성으로 왜적을 막기 위하여 산성을 쌓아 관문을 막은 호남 제일관문이었다.

관(關)이라는 글자가 빗장 관이다. 빗장을 걸어 잠그면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관이므로 군사시설인 요새를 의미하는 말이다. 만마관이 있는 이곳을 전주의 남쪽에 있는 관이라 하여 남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남관에 있는 만마관 문이 닫히면 전주에서 나가지 못하고 위쪽에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그곳을 상관이라 했다.

남관진은 구례의 석주관(石柱關)과 함께 호남을 지키는 요충지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만마관이 닫히면 다음 날 아침이 오기까지 문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사람들이 관문 밖인 노구바위 마을에서 마물렀다. 그러다보니 이곳이 주막과 여인숙이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노구바위 마을은 춘향전에 나오는 신관사또 변학도가 부임지인 남원을 가던 중 점심을 먹은 이기도 하다. 노구암(爐口巖)은 용암리 산정마을의 옛날 이름이다.

 

이곳은 임실이나 남원쪽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첫 번째 관문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오고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호남제일관문(湖南第一關門)이라 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남원전투에서 승리한 왜군들이 바로 전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아중리 동쪽 왜망실로 돌아갔다가 참패한 것도 바로 이곳에 만마관이 있었기 때문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만마관은 전주를 지키는 관방시설 역할을 하다가 순종 원년인 1907년에 성벽을 철거하는 작업을 하면서 관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후 철도가 건설되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파괴되어 관문의 흔적이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남원에서 전주로 올라오는 도로 오른편 개천 건너 산자락 아래에서부터 정상부까지 돌로 쌓은 벽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동네 이름이 말 마(馬)자를 쓴 마자(馬子) 마을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많은 말들이 있었고 말을 새끼 낳아 기르기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관진에 대한 기록은 현재 남관에 서있는 남관진기록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비는 고종 10년인 1873년에 세워진 비로써 남관비 창건 경위와 위치, 규모 등이 기록되어 있다.

 

남관진은 만마관이 만들어진 이래 전라우도 암행어사 이돈상과 전라감사 이호준이 만마관 정비와 진영 설치를 다시 건의함으로써 만들어지게 되었다.

 

남관진은 진장 내부시설로 정무를 보던 건물인 관아와 군영 울타리, 군대주둔 경계 창고, 지출을 집행했던 출납기관, 지휘관 지휘소인 장대 등을 갖추었고 진장 외부 시설로는 화포를 관리했던 화포청 등이 있는 100여 칸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남관진에는 화포부대가 있었고 화포를 배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관진은 호남의 주요 군사요충지에 세웠던 관방으로 만마관을 운영, 관리하는 일을 해오다가 1907년에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만마관이 있었던 지점에서 바라본 슬치고개 도로

 

현재 남관진과 관련된 건물은 없다. 지표상의 유물이나 고지도 분석, 그리고 주민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당시의 주요 건물들이 지금의 남관 마을에 분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남관 윗동네인 상관도 남관진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 남관진 창건비는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철로 주변에 세워져 있었는데 유실되어 감추어져 있다가 전주-남원 간 도로확장 공사 때 발견되어 2006년에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남관진 창건비는 2017년 완주군 향토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현재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제일문(전라감영문), 호남제일성(풍남문), 호남제일루(광한루), 호남제일정(피향정)은 존재하고 있으나 호남제일관문이었던 만마관은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하루 속히 만마관도 복원을 하여 호남제일관문으로써 구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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