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사라지고 서원비만 남아
전라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은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화산 산자락에 있는 화산서원이었다.
예수병원 뒤쪽으로 화산을 오르다 보면 도로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 서원비가 하나 서 있다.
“전북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화산서원비다. 서원은 보이지 않고 서원이 있었던 자리에 서원비와 비각이 서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학문 연구와 선현 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기구였다.
서원의 기원은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이 되었지만 송나라 때부터 정제화(定制化)되었는데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연 후로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 38년인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시한 것이 효시다.
그 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방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유학 교육을 통하여 향토 지식인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보통 선현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당과 교육을 담당하는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그러나 점차 서원이 늘어나면서 기본을 이탈하는 경우가 생기고 자기 가문을 위해 후손이나 문중에서 설립하는 경우도 생겨 제재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침내 고종 8년인 1871녀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의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서원은 47개 서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9년에는 소수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전주 중화산동의 화산서원은 선조 11년인 1578년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전주부윤으로 부임하여 백성의 교화에 힘썼던 조선 전기의 대학자 이언적(李彦迪)과 전라감사로서 청렴한 정치를 펼쳤던 송인수(宋麟壽), 두 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전주부윤은 조선시대 한성부윤 다음으로 설치된 곳으로 후에 평양, 함흥, 경기도 광주, 의주 등 6곳이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특별시장이나 직할시장에 해당된다.
화산서원은 효종 9년에 나라에서 이름을 지어주고 지원을 해주는 사액서원으로 선정되어 화산(華山)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받고 서책과 토지 및 노비 등을 받아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고종 5년인 1868년에 헐리고 말았다. 그후 그 자리에 향교가 들어섰다가 향교가 교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서원비는 서원이 있던 자리의 원정비(院庭碑)인데 거북받침돌 위로 비를 세우고 용 모양의 머릿돌을 올려놓았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나르는 용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납작하게 만들어진 거북받침은 특이하게 옆을 향하고 있다.
비문은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그리고 서예계의 거두였던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써서 현종 5년인 1664년 3월에 비석을 세웠다.
같은 이름의 화산서원이 익산시 금마면에도 있다. 익산의 화산서원은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후에 송시열을 추가하였다.
전주의 화산서원비는 예수병원 뒤로 돌아나가는 선너머 3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찾을 수 있고 중화산동 백제로 쪽에서 올 때는 우석대 한방병원과 우석대 한의과대학을 거처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화산으로 산책을 다니는 사람은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산책로 입구에 있는 전북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 있었던 자리인 화산서원비를 둘러보고 갈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서 인정해주고 지원을 해주었던 사액서원인 만큼 서원과 함께 우람한 자태를 뽐냈을 서원비지만 지금은 서원은 완주군 소양면 신월리로 옮겨가고 서원비만 남아 쓸쓸하게 터를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