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보다 후학 교육에 몸 바친 남계 김진이 지은 정자
전라북도 구이면 원두현길 12-12의 위치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된 정자가 하나 있다. 이 정자가 남계정(南溪亭)이다.
남계정은 조선시대 중기 학자 남계(南溪) 김진(金珍)이 지은 정자다.
이 정자가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정자들이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풍광을 즐기려고 만드는 게 보통인데 남계정은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계정은 김진이 후학들의 학업을 위하여 54세 때인 선조 13년, 1580년에 지어졌으며 현종 14년인 1673년에 중수를 하고 철종 7년인 1856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1993년에 지붕과 기둥에 대한 보수가 있었다.
정자는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와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공포는 주심포 양식이다.
남계(南溪) 김진(金珍)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다. 남계는 그의 호이며 자(字)는 이온(李溫)이고 본관은 통천이다.
김진(金珍)은 조선 중종 22년인 1574년에 출생하여 스물다섯 살에 초급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다. 선조 7년인 1574년에 합천에서 합천 도교를 지내면서 훈도로서 생도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학문수련과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벼슬을 높이 한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우러러 따랐다.
남계정 안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 전라도 관찰사 신응시 등 당시의 유림들이 남계의 학문과 덕망을 찬양한 현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남계정 밑에 있는 절벽 아래 바위에는 한자로 남계정이라고 암각서가 새겨져 있다.

남계정은 산 끝의 절벽 위에 새겨져 있으며 이 누각에 오르면 통천 김 씨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는 600년 정도 된 두현리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멀리 모악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강원도 통천이 본인 통천 김 씨가 어떻게 전주 근방인 구이에 와서 600년이 넘도록 자리를 잡고 살았을까?
통천 김 씨는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인 교(較)를 시조로 하고 본을 통천에 둔 씨족이다.
통천 김 씨가 구이로 들어오게 된 경로는 관직이다. 전주와 고부에서 군수를 지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따라왔던 가족들이 자리를 잡아 터를 넓혀 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여립 사건이 터지면서 통천 김 씨 가문도 여기에 휘말려 한바탕 소용돌이를 만난다.
그 중 통천 김 씨 김빙(金憑)은 형조좌랑으로서 정여립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장소에 있었는데 평소에 눈병이 있어서 눈물이 자주 났다. 그래서 눈을 자주 닦아야 했는데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애증으로 간주되어 같은 편으로 묶이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죄명을 쓰고 잡혀 들어가면 무슨 죄명이든 뒤집어쓰기 마련이다. 김빙은 정여립의 한 편으로 잡혀가 고문 끝에 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역적의 편으로 타격을 받은 집안은 이어서 일어났던 임진왜란으로 마지막 남은 대과 급제자이며 중앙 관직에 나가 있던 한림 김여련이 한성전투에서 순절하고 집안과 가까이 지내던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이 금산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의지할 곳조차 잃게 되었다.
정여립 사건을 말할 때 바람이 불어 먼지가 눈에 들어가 눈을 비비거나 눈물을 흘리던 사람들도 역적을 동경하였다 하여 잡혀 들어갔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는데 바로 김빙이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빙은 그 후 인조 2년인 1624년에 누명을 벗게 되고 병조판서로 추증된다. 그러나 한 번 받은 피해는 회복이 어려울 만큼 큰 타격을 받고 통천 김 씨 집안은 이후 조용한 전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통천 김씨는 주로 구이면 두현리와 두방리에 거주하며 종산이 청명동 골 안에 있다. 그리고 완주군 소양면 일임리에 선영이 있고, 전주의 동쪽 도당산 노루명당에도 반암선영과 묘가 다수 있다.
대부분의 정자들이 선비들이 심신을 달래기 위해 지었던 시대에 후학들의 학문 정진을 위해 지었던 남계정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는 정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