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하나만 묻혀 있는 논산의 성삼문 묘
“오늘은 좀 멀리 나갑시다.”
아파트 입구까지 와서 기다리는 그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먼 데면 어디? 강원도?”
“논산이요.”
“애게게, 겨우 논산이여. 금산이나 논산은 전북이나 다름없는데”
사실 그렇다. 금산은 전북 땅이었는데 군 단위로 몽땅 들어다 충남에다 갖다 놓았고 논산의 강경도 본래는 전북 땅이었는데 충남에서 가져갔다. 그래서 거리로나 마음 적으로 지척인 것이다.
논산에 있는 성삼문 묘를 보러 가잔다.
성삼문 묘는 전국적으로 여기저기 있다고 한다. 사지를 찢어 8도에 흩뿌렸다 하니 사방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은 찾을 수가 없다. 성삼문이 처형을 당한 한강변 노량진 부근에 김시습이 몰래 성삼문의 시신의 일부를 묻었다는 곳은 어디인지 알 길이 없고 충남 홍성군 홍복면 노은리의 성삼문 유품이 묻힌 곳이 있으며 논산 가야곡면에 있는 다리만 묻힌 일지총(一支塚)이 있다.
묘소에 이르면 사당이 나온다. 사당 앞에 큰 비가 서 있다.
그 옆으로 길게 나 있는 묘소 가는 길은 걸어가는 동안 성삼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태어날 때에 시간을 세 번 물었던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만고의 충신이 되는 길이 사지를 찢겨 죽고 가문이 멸종당하는 고난의 과정이었을까? 그래서 얻은 만고의 충신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성삼문의 자손과 숙주나물이라는 변질의 대명사의 길을 간 신숙주의 자손들은 어떤 대접을 받는가?
묘소에 이르면 지름이 13m요 둘레가 30m에 이르는 큰 묘가 나온다. 묘 둘레에 상석도 있고 문인석과 돌기둥도 있다.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하마비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앞의 풍광이 좋다. 탁 트인 시야가 멀리까지 벋어 대둔산이 보인다.

이 묘는 성삼문의 한쪽 다리만 묻힌 일지총(一支塚))이다. 그는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은 양팔과 양다리를 각각의 다른 수레에 묶고 네 마리의 말을 몰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게 하는 극형이다. 그리고 그 시신의 조각들을 길거리에 내동댕이 친 후 누구도 그것을 거두어가는 자는 극형에 처하는 형이다. 성삼문은 한강변 노량진에서 거열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성삼문의 다리 하나를 여기까지 가지고 왔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그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다. 논산 사람이라면 또 다른 논산의 의인이다.
성삼문 묘소를 둘러보고 나오며 천판욱 선생이 수양대군과 대조되는 인물로 중국의 주공 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공 단은 주나라 성립 초기 무왕을 도와 은나라 폭군 주왕을 제거하고 천하를 얻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다. 형인 무왕이 죽자 형의 어린 아들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 통치를 하다가 성왕이 성장하자 왕에게 권한을 넘겨주고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한 사람이란다. 공자도 주공 단이야말로 예와 법도를 실천한 위인이라고 칭송했다 한다.
성삼문은 충남 홍성군 홍복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했다. 성삼문은 태어날 때 세 번을 묻고 세상으로 나왔다고 한다. 사주팔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세종 17년에 18살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 후 식년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했다.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며 정음청(正音廳)에서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한글 창제를 위해 일했다. 명나라 언어학자 황찬에게 13번이나 왕래하며 음운을 논하였다.
세종의 지시를 받고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기도 했다.
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있은 후인 세조 원년인 1455년 4월, 단종 복위를 시도했으나 동료인 김질의 밀고로 아버지 성승과 동생 삼빙, 삼고, 삼성과 아들 맹첨, 맹년, 맹종 등 어린아이까지 살육을 당하여 대가 끊겼다. 부인 연안 김 씨와 외손이 제사를 모셔오다가 그것마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1672년에 성삼문 신주와 외손의 신주가 발견되어 송시열 주관 아래 충남 홍성에 모시게 되었다.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10월 그믐날에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가야곡면 양촌리에는 성삼문이 처형되던 해에 심어졌다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읊어보았을 성삼문이 지은 시조가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그런가 하면 중국의 주나라 무왕의 은나라 정벌에 반대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백이와 숙제를 탄하는 시조도 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진정 채미도 하는 건가
아무리 푸새엣건들 그 뉘 땅에 났나니
그리고 그가 마지막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읊었던 절명시가 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客店(황천무객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하는구나.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