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독립을 동시에 실천한 초창기 교회

익산 오산의 남전교회

작성일 : 2022-05-11 20:09 수정일 : 2022-05-12 09:11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성, 질문하나 드리겠소. 우리 전북의 교회사에서 미국의 선교사 전킨의 공적에 대하여 아시오?”

“알지.”

“그럼 그가 세운 교회가 어디인지 아시오?”

“어? 그건 모르겠는데…”

“그 교회를 찾아갑시다.”

 

언제나 질문 하나로 시작하여 취재를 나가자고 부추기는 사람은 재야 인문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기독교가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서양의 근대화된 문명을 들여와서 수천 년간 잠자고 있던 국민의식을 일깨웠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깨우쳤다.

때마침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선교와 독립운동을 병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함께한 교회가 있으니 전북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에 위치한 남전교회(담임목사 송승형)다.

 

남전교회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897년 호남지역으로 파견된 전킨(W.M.Junkin-한국명 전위렴))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다.

전북의 기독교 역사에서 전킨 선교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크다. 그는 김제에 송지동 교회를 세우고 이어서 익산에 남전교회를 세웠다.

 

전킨(W.M.Junkin) 선교사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 미국의 교회가 구역을 나눌 때에 호남지역을 맡은 미국 남장로교의 7인의 선발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전킨 선교사는 1892년에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호남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익산지역의 선교의 아버지다. 그는 송지동 교회와 남전교회를 세우고 군산에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를 세웠다. 그러므로 남전교회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먼저 세운 교회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는 폐렴에 걸려 43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 한국에 묻혔다. 그의 묘소가 예수병원 앞의 선교사 묘역에 있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 아이들의 묘도 같이 있다.

 

남전교회는 교회 역사의 흔적을 비교적 잘 보존해온 교회다. 특히 삼일 만세운동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잘 보존하고 이를 널리 알리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려 애쓰고 있는 교회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4일, 솜리(현재 익산시) 장날에 농민 수탈의 중심에 서 있던 대농 농장 창고 앞에서 남전교회 교인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때에 앞장섰던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일컫는 열사’의 칭호를 받고 있는 문용기 열사, 박영문, 장경춘 열사 등이었는데 모두가 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도적으로 앞장섰던 문용기 열사는 남전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독실한 성도였다. 그는 24살에 전킨 선교사가 세운 군산 영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워낙 우수한 학생이어서 학생으로서 한문 교사를 겸하였다. 30세가 되던 1908년에는 목포 영흥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에서도 한문 선생을 겸하였다.

그 후 학업성적이 일취월장하여 영어에도 뛰어나 이승만 박사가 목포에서 계몽 연설을 할 때에 찬조 연설을 맡기도 하였다.

1911년 함경도 갑산 미국인 광산에서 통역사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역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드디어 4월 4일 문용기 열사는 최대진 목사와 함께 익산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남전교회 성도들과 남전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 등 2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1,000여 명에 이르렀다. 문용기 열사는 맨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무차별 총을 쏘고 곤봉과 갈고리로 후려쳤다.

문용기 열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이 문용기 열사의 태극기를 든 손을 칼로 잘라버리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다시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왼손마저 칼로 잘라버렸다. 두 팔을 잃고도 그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은 그의 몸을 난도질을 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6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이 체포되어 끌려갔다.

 

 남전교회 마당에 설치된 익산  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와 당시의 만세운동 재현 조형물

 

이날의 만세운동에 대하여 전주지역의 선교사였던 부위렴은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보고서에서 남전교회 성도들의 4‧4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이리 교구장 이중렬이 중심이 되어 4월 15일과 4월 18일에 황등 장터와 함열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이어서 금마, 춘포, 웅포, 삼기, 강경, 망성 등 여러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익산시에서는 남전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4‧4 만세운동을 일으킨 익산 솜리 장터였던 남부시장 대농 농장 자리에 ‘익산 항일 독립운동 기념관’을 세워 4‧4 독립만세 운동의 정신을 기리게 하고 있다.

 

남전교회에서는 ‘익산 4‧4 만세운동 제103주년 기념 예배와 ‘익산 4‧4 만세운동과 남전교회’ 책을 발간하고 출판기념회도 개최하였다. 또한 교회 마당과 내부에도 이에 대한 게시물들을 잘 보관 관리하고 있고 당시의 시대적인 자료도 함께 게시하고 있다. 

 

현재 남전교회 마당에는 ‘익산 4‧4 만세운동 순국열사비’가 서 있고 익산역 광장에는 ‘삼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으며 남부시장에 서 있는 기념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순국선열비’가 서 있다.

 

시대가 달라진 오늘날에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교회와 성도가 함께 간직해 나가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 할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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