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에만 세 곳이 있는 조선팔도 십승지(十勝地)

위사(危事) 시 난리를 피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피난처

작성일 : 2026-03-16 07:41 수정일 : 2026-03-16 08:57 작성자 : 이용만 기자

 

 

 

형님, 조선시대에 난리를 피하여 안전하게 숨어들 수 있는 곳이 열 곳이 있는데 어디 어디인지 알고 있나요?”

열 곳을 다 알지는 못하지. 국사 시험도 아닌데 다 외울 게 뭐 있어?”

그럼, 전북에 3개가 있는데 그것은 알고 있나요?”

뭐라고? 열 개 중 전북에 세 개나 있다고?”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은 오랜만에 입을 연,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십승지란?

 

십승지(十勝地)는 십승지지(十勝之地) 또는 승지(勝地)라고 한다.

십승지는 세상이 난리가 났을 때 난리를 피하여 숨어 들어가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안전한 곳 열 곳을 말한다.

십승지는 조선시대에 자주 난리가 나고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하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하여 찾은 곳이다.

 

승지는 원래 자연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말하는데, 조선 중·후기 사회 혼란과 경제 피폐가 심해지면서 개인의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 입지 조건이었다.

이 십승지는 조선 중·후기에 민간 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승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이다.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이며, 십승지라고도 한다. 십승지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중에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조선 십승지를 알려준 정감록

 

그런데 조선 팔도 방방곡곡에서 선정한 십승지인데 전북에 3곳이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전북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십승지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의 이상향에 관한 민간인들의 사회적 담론이었다. 십승지 관념은 조선 중후기에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및 인구이동, 그리고 공간인식에 큰 영향력을 주었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십승지의 입지 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십승지로 지목된 곳은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현 봉화읍),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이다.

 

  조선시대 열 곳의 피난처, 십승지 

 

 

전북에 있는 십승지 세 곳

 

 

1. 운봉 두류산 동점촌

 

지리산 지역의 십승지는 운봉 두류산, 혹은 운봉 행촌 또는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100리 안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운봉에 있다는 지리산 십승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교 지식인들과 지리산 주변에 거주하는 지역민들 사이에도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운봉 두류산 아래에 동점촌이 있는데, 100리 내에 영구히 거주할 만한 곳이 있는데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근래에 어떤 운봉 사람이 비로소 찾았는데 말하기를 읍에서 거리는 25리이고,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掛峽處)이며, 석벽의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銅店)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한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제련하던 곳이다. 그렇기에 근방에 돌을 파내고 구리광을 캐는 흔적이 많다.

동점촌은 그 가운데에 있는데 평탄하지만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제법 넓다.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농경지라고 한다.

 

  남원 운봉이 십승지였음을 알리는 안내석

 

 

2. 무주 무풍

 

이곳은 어디에든 피난 못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십승지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내용은 감결외에도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은 조선시대의 도로 교통 조건에서 큰 길과 떨어져 있어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南師古)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무주 무풍 십승지 안내판

 

3. 부안 호암(壺巖) 아래

 

() 자는 병, 단지, 박을 의미한다.

부안의 호암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있는 바위인데 우동리 초입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 아래로 바위굴이 보인다. 동굴 안에서 굴 밖을 보면 입구가 마치 병을 세워 놓은 모습이라 호암(壺岩), 즉 병바위라고 부른다.

굴 안으로 들어가 보면 100명은 충분히 숨어 살 정도로 아늑하고 평탄한 큰 공간이 있다. 동굴 안에는 침샘이라 부르는 샘물이 있는데 한방에 특효가 있어 물을 마신 뒤 병을 고친 사람이 많다고 한다.

 

호암은 산과 바다가 에워싼 외부와 고립된 곳이라 외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반면, 곰소에서 나오는 해산물과 산과 들에서 나오는 임산물을 모두 얻을 수 있어 생존환경이 우수하고, 나아가 위험에 처하면 산이나 바다를 이용해 가까운 섬으로 피신도 가능한 곳이다.

 

호암이 있는 우동리의 감불 마을은 남대봉, 감투봉, 망월봉이 삼면을 감싼 삼태기형 마을인데 풍광이 우수하고 천마산이 바다를 가로막아 안전한 곳이다.

 

십승지,  부안 병바위 호암

 

 

그 밖의 십승지 일곱 곳

 

 

1. 풍기 금계촌

 

조선 십승지 중에서 풍기 금계촌은 첫 번째로 등장하는 곳이다.

풍기에서도 소백산 아래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은 풍기 승지의 대표적인 장소로 꼽혔다. 1959년 기준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의 이주 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풍기읍 중심지에서 정착하여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은둔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풍기에는 근래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그림지도를 소장하고 있기도 한다.

 

 

 

2. 봉화 내성촌

 

경상도 봉화군은 예로부터 봉승사화(奉承士化)라 하여 선비를 받들고 숭상하는 고장으로 소문난 곳이다.

이곳 봉화군(奉化郡) 춘양면 도심리에는 감동골이란 마을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 선생이 감동골에 움막을 짓고 가족과 함께 피난했던 곳이요, 류성룡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에 와서 머물렀던 곳이다.

 

도심리에는 갑옷골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우리 마을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 이후 죽지 않고 이곳에 숨어들어 은거하던 곳이라 갑옷골이 됐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순신과 친했던 서애 류성룡이 이곳에서 살았고 임진란 이후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이순신에게도 이곳에서 같이 지내자고 권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처음에는 전쟁터였던 남해의 관음포에 임시로 모셨다가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고금도로 옮겼다. 그해 말 시신을 육로로 이용해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운구해 이듬해 선조 32(1599) 2월 인근 금성산(음봉면 산정리)’에 모셨다.

 

이후 이순신이 선무공신 칭호를 받고 좌의정으로 추증되자 광해군 6(1614)에 현재의 삼거리 어라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사후 15년 만에 이장을 한 이유는 뭘까? 16년 동안 춘양에 숨어 살았던 이순신이 그때쯤 진짜 세상을 떠난 것이라 한다.

 

이것은 이곳 주민들의 이야기다.

이곳이 조선 십승지인데다 이순신과 친했던 서애 류성룡이 살던 곳이라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3. 보은 속리산 증항촌

 

충북 보은군 속리산 밑 증항 부근으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곳이다.

 

속리산 동편에 우복동(牛腹洞)이 있다.

우복동이라는 말은 골 어구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송아지가 땅에 배를 붙이고서야 들어갈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은 검은 머리 아버지가 흰머리 아들을 꾸짖는 곳이라 한다. 불로장생하는 곳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아주 비옥한 땅이 있다는 것이며 돌고 돌아 들어가는 곳이어서 아무나 찾기 힘든 곳이라 한다.

이곳을 한 한 선비가 찾아다녔는데 산 둘레만 계속 돌고 돌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십승지 중의 하나인  속리산 우복동

 

 

5. 예천 금당실

 

자고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물 위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금당실 마을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일대에 자리한 마을을 일컫는다.

마을에는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 터를 비롯하여, 초간 권문해의 유적인 종택과 초간정, 용문사, 금곡서원, 추원재, 사괴당 고택, 조선 숙종 때 도승지인 김빈을 추모하는 반송재 고택 등의 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10여 채의 고택 사이를 미로처럼 이어주는 돌담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는 초간정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당실 서북쪽의 소나무 숲이다. 금당실 오미봉 아래에서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수령은 약 200년이나 되었고, 높이는 13~18m 정도의 구불구불하게 자란 자연림이다. 수해 방지와 방풍을 위하여 조성되었고, 오늘날은 마을의 휴식처와 행사 중심지로 이용이 되고 있다.

 

지금은 복원된 초가 6채와 기와가 7채에서 전통 한옥 민박을 할 수 있는 체험 마을이 되어 있다.

 

 

 

6. 공주 계룡산 유곡, 마곡

 

계룡산 부근은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려고 생각했던 길지다.

정감록에서 조선이 망하고 정씨 왕조가 열리면 이곳이 도읍지가 될 거라고 하였다.

 

이곳 유곡, 마곡은 두 물골의 둘레가 2백 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계룡산 [鷄龍山] 높이 847m의 산으로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산이다.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쌀개봉, 삼불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흡사 닭 벼슬을 한 용의 형상이라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평화로울 때나 난리가 났을 때나 모두 살 만한 곳"이라고 극찬했다.

1872<공주목지도>를 보면 유구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면서도 안쪽으로는 넉넉한 분지가 펼쳐져 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땅이 기름져 흉년을 모르는 곳이다.

 

이 땅의 진가는 6.25 전쟁 이후에 빛났다.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정감록의 기록을 믿고 유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빈손이었지만, 가슴 속에는 소중한 씨앗을 품고 있었다. 바로 고향에서 배운 '직조 기술'이었다.

 

피난민들은 유구의 맑은 물과 자신들의 기술을 합쳐 실을 뽑고 천을 짜기 시작했다. 전쟁의 상처 위에서 '유구 직물'이라는 꽃이 피어났다. 윙윙거리는 베틀 소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동의 찬가였다.

공주 유구 십승지는 단순히 숨을 만한 곳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재건의 터전이었다.

 

  예로부터 신비한 산이었던 계룡산

 

 

7. 영월 정동쪽 상류

 

강원도 영월(寧越)'무사히 넘어가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세조가 단종을 유배 보냈던 곳이다. 외부와 단절된 곳이기에 십승지 안에 들었다.

이곳은 임진왜란도 피해 가고 한국전쟁도 피해 갔다는 곳이다.

난리를 피해 갔으니 십승지가 틀림없다.

 

산 속에 갇힌 영월의 여러 지역 중에 대야리 가재골(可在洞)이 있다. '가히 살아남을 만한 곳이다'는 의미로 가재골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가재골은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해지자 정감록에 심취한 평안도에 살던 박씨들이 십승지를 찾아 이곳으로 이주한 데서 유래했다. 일설에는 본동과 떨어진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재골'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안도 박 씨들이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입구를 제외하곤 배와 수레의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수구처 등이 험한 계곡과 협곡을 이루어 이방인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형세다. 외부와의 연결 통로는 모두 마을 입구 한 곳으로 연결된다. 원래 외부와의 연결 통로가 어디인지, 신작로가 나기 전에는 어떻게 다녔는지 궁금했다. 계곡을 들여다보면 아찔할 정도로 깊다.

삼면이 급사면으로 둘러싸이고 입구는 천길 계곡이 흘러 남한강과 합수되는데, 누가 이런 곳을 찾을 수 있겠나 싶은 곳이다. 산자락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분지의 주거공간엔 물이 풍부한 지형이다. 논농사는 아니지만 밭농사는 어디를 개간해도 괜찮을 정도로 비옥한 땅이다.

 

 

 

십승지지는 조금씩 다른 필사본이 40여종에 달하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십승지는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입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지리적으로 내륙의 산간 오지에 위치하며, 한양이나 고을로 이어지는 큰길에 인접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계이선생가장결황간 영동 사이에는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의 표현으로 보아서도,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후기에 내외의 전란 및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상향을 중국의 무릉도원과 조선의 청학동이라 하였다.

그런데 정감록에서는 청학동을 십승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마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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