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민족대표 박준승 선생 생가를 찾아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숭고한 애국정신

작성일 : 2022-05-28 04:51 수정일 : 2022-05-28 08:44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일제강점기 때에 애국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어놓고 살았다. 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서 온갖 호화호식을 누리고 있을 때 그들은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으면서 피해 다니면서 숨어서 살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아야 했다.

 

독립 운동가들의 평생소원이었던 독립이 되면 그들의 세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다 그렇게 되는 게 순리요 원칙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존재를 상실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지위를 버리고 개인 자격으로만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는 원칙 아닌 별칙이 생기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단죄를 받기는커녕 버젓이 나돌아 다니고 정부의 고위직에 기용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오죽했으면 대구에서는 경찰들의 항거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 국민을 못 살게 굴던 고등계 형사가 경찰의 고위직으로 임명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애국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좌익 사상을 가진 빨갱이로 몰려 죄인으로 몰아버렸다. 또다른 고난의 생을 살아야 했다.

 

이승만 정부가 잘못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일제 청산을 못한 것이다. 그것이 그대로 이어지다가 이제야 겨우 일제청산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독일군에 협조했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단죄를 하였다. 유명한 여배우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친일파가 아닌 임시 정부 요인들이 원인 모르게 암살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애국지사들이 마음을 졸여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도 일제 말기에 가서는 일제에 협력하는 변절자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지조를 지켜온 민족대표 가운데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에서 태어난 박준승 선생이 있다.

 

3‧1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준승 선생 생가를 찾아가는 데는 생가 마을에 위치한 옥석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과 동행하는 것이 딱이다.

 

박준승 선생의 생가는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인데 예로부터 양반들이 사는 고장이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박준승 선생 생가에 도착하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유허비다. 유허비란 성현이 태어났거나 그곳에서 살았거나 잠시 머물렀던 곳, 순절하거나 귀양살이를 하였던 곳을 말한다. 현재 남아 있는 유허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경기도 개성에 있는 “고려충신정몽주지려”라는 문구와 함께 중종 25년(1530년)이라는 간단하게 기록된 것이 유허비의 초기로 본다.

전국적으로 유허비가 많지만 대표적인 곳이 충남 논산의 성삼문 유허비, 경주 김유신 유허비, 최치원 독서당 유허비, 제주도 송시열 정려 유허비 등이 있고 전주의 오목대에는 “오목대 조선태조 주필유지비”가 있다.

 

이 유허비에 쓰인 내용에 따르면 그동안 박준승 선생 생가를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서 유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부득이 마을 회관 뒤 공터에 1993년 4월에 건립하였다가 임실군에서 박준승 선생 생가 복원사업을 벌여 2013년 10월에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안내문이 서 있다.

 

 

박준승 선생은 이곳 옥석리에서 태어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왜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형무소를 나가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조선 독립국의 국민이었다. 나는 독립운동을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할 것이다.”

이러한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에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로 남울 수 있었으리라.

그러다가 1927년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임실군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인 박준승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임실군과 박준승 선생 기념사업회는 박준승 선생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으로 인해 교도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날인 1921년 11월 4일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11월 4일에 추모행사를 연다. 추모행사는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 기념사업회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박준승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는 데 의미를 담고 있다.

 

박준승 선생이 이와 같이 굳은 의지와 변하지 않는 애국심을 갖게 된 원동력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어릴 적 선생님이었던 김영원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7살 때부터 서당에 다녔던 박준승 선생은 10살 때에 김영원 선생을 만나게 된다. 김영원 선생은 동학에 깊이 관여한 사람으로 임실군 청웅면에 삼화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박준승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정읍시에서는 박준승 선생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활동한 공적을 기려 정읍시 산외면에 박준승 기념관을 설립하여 추모하고 있다.

박준승 선생이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동학이 교세를 어느 정도 확장한 시기였다. 그는 35세가 되던 1891년에 그동안 수학하던 한학에서 벗어나 동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894년 1월 고부민란이 일어나자 당시 농민이요 동학교도였던 박준승 선생은 동학혁명에 참여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실패하게 되고 동학 잔당을 색출하는 일제와 친일정권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전라도 지역 동학 접주가 되었다. 그는 임실, 정읍, 순창, 남원, 장성 등 호남일대에서 동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꿈이었던 봉건체제의 타파와 근대 자주 민족국가의 건설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박준승 선생의 생가에 서 있으면 평범하게 농사일에 종사했을 박준승 선생을 동학에 참여하게 하고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 원동력이 김영원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생각할 때에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 바쳐온 필자나 이곳으로 안내한 천판욱 선생도 박준승 선생의 생가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 지나온 교직생활을 회상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숙연한 한때를 보냈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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