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조성한 기념관
한 사람의 배우는 백만 사람을 웃게 한다.
한 사람의 배우는 세세손손 천만인의 정서의 샘이 된다.
한 편의 영화는 만 권의 책이 된다.
국민배우 장진영은 산골인 임실 운암의 임운로 고갯길이 시작되는 곳에 누워 있다. 그곳은 섬진강 옥정호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를 만나러 가려면 전주에서 구이를 지나 밤재를 넘어 운암면 소재지까지 와서 다시 신평으로 가는 고갯길을 찾아야 한다.
그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선산에 있다. 그가 생전에 자기가 죽게 되면 할아버지 옆에 묻어 달라 했다고 한다.
우리는 관촌을 지나 신평을 거쳐 운암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을 타고 그곳에 갔다. 전에 없던 추모비가 높이 솟아 있다.
“국민배우 장진영 추모비”
거기 쓰여 있는 글씨는 장진영의 아버지 장길남 씨의 솜씨다. 거기뿐만 아니라 곳곳에 있는 글씨는 모두 아버지 장길남 씨의 글씨다. 그는 서예가다. 그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글씨를 보면 눈을 크게 뜨게 된다. 그는 강암 선생님께 사사를 받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는 출입문이 닫혀 있다.
그런데 저쪽 정원에서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다. 닫힌 문을 넘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저는 임실 삼계 사는 사람입니다. 전에 왔을 때 아버님이 바쁘셔서 기념관 안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신문 헬스케어뉴스 기자입니다. 오늘은 꼭 보고 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기사도 쓸 수 있습니다.”
옆에 있는 손자를 부른다.
“기념관 문을 열고 이 분께 안을 보여 드려라.”
그리하여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

장진영 기념관에는 장진영이 배우로서 활동해온 화려한 내력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이며 그가 살아생전에 쓰던 물건들이며 남긴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고 관련되는 물건들이 있다.
그중에는 일기장도 있고 신발도 있고 옷도 있다. 주민등록증도 있고 여권도 있고 학위증도 있다. 각종 상장과 트로피도 있다. 거기에 낡은 재봉틀이 하나 있다. 그는 상명대학교 미술학과 의상디자인 전공이다. 이 재봉틀은 그가 학교 다니면서 옷을 만들어보던 재봉틀이라 한다.

예로부터 부모가 죽으면 땅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다.
장진영기념관은 딸을 가슴에 묻은 그의 아버지 장길남 씨가 만든 기념관이다. 흔히 후손이 잘되면 조상의 묘가 높아진다 했다. 그러나 장진영은 아버지를 잘 만나 기념관 안에 거주하게 되었다.
장진영의 아버지 장길남 씨는 현재 삼화화학 대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삼화노트 사장님으로 기억한다. 전에 전주 남문 근방의 삼화노트는 문방구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곳이다. 당시에 학생으로서 그곳에 가서 노트나 연필을 사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은 돈을 아낌없이 딸 장진영에게 쓰는 것이다.
장진영은 1972년 6월 14일 전주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전주초등학교, 기전여자중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다녔던 완전 전주 토박이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이미 ‘흑장미’로 불리던 인기인이었다.
그는 대학을 연예와는 전혀 다른 미술학과에 다니면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했다. 그가 연에계로 진출한 것은 1992년 미스 충남 진으로 선발되면서부터다.
KBS 2TV 미니시리즈 「내 안의 천사」에 출연하면서 연예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1999년에는 영화에 진출했는데 데뷔 영화가 「 자귀모」였다.
2001년에는 김명민과 함께 출연한 영화 「소름」을 통하여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주목을 끌었다. 그 후 「국화꽃 향기」와 「싱글즈」를 통해 청룡영화제에서 다시 여우주연상을 받아 국민여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 수많은 영화와 TV에 출연하며 국민배우로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나도 순풍산부인과에서 나오던 간호원 장진영을 기억한다.
2008년 9월, 건강검진 중 위암이 발견되어 치료와 요양에 힘을 기울였지만 별 효험이 없어 보였다. 2009년 7월 26일 미국 라스베커스에서 김영균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그날이 2009년 9월 1일이다. 사람들은 그날을 기억한다.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김진영은 처음에는 경기도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에 안장했는데 그 후 아버지가 선산이 있는 운암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기념관 뒤 선산에 있다. 그의 무덤은 둥근 어머니의 젖가슴 모양을 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국민배우 계암 장진영 묘”라 쓰여 있고 그 아래 한 구절이 더 쓰여 있다.
“마음속에 은은한 향기로 살아 숨 쉬리라”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의 모습으로 남는다.
그래서 열여섯 살의 유관순과 스물여덟 살의 남이 장군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장진영을 서른일곱의 심플하고 풋풋하던 눈웃음이 고왔던 여인으로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끼를 다 발산하지 못하고 멀리 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할아버지 계시는 선산에 와 있다.
장진영 기념관에는 그의 모습이 가득 차있다. 상큼하고 생글거리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글방이라도 성큼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그의 모습이 가득 차 있다.
기념관을 살피고 밖으로 나오니 동행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새 장진영 아버지 사무실에 들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커피까지 마시고 있다. 어디에다 팽개쳐놔도 밥을 굶지 않을 사람,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그새 얻어들은 정보를 재빨리 전한다. 현재는 삼화화학 대표이신데 전에 전북 사람이면 다 아는 삼화노트 사장님이었다고. 벽에 걸려 있는 족자의 글씨가 모두 진영이 아버지 글씨라고.
좀체로 입을 열지 않는 진영이 아버지다. 입을 열면 아픈 가슴에 상처가 터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입을 열게한 천 선생도 대단한 사람이다.
아! 그랬구나.
이 기념관과 묘지에 새겨진 글씨들이 모두 아버지의 글씨였구나.
아버지 장길남 씨는 장진영의 호인 계암(啓巖)의 이름을 따 계암장학회(啓巖獎學會)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장학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고 있단다.
장진영이 살아 있을 때에 매년 전주중앙여고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북대학교에 1억 원의 장학금을 기탁했고 5천만 원의 발전기금을 냈으며, 임실군청에도 1억 원의 장학금을 기탁했다고 한다.
백만 인이 울어준들 어찌 부모의 울음에 비하랴!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면서도 아픈 마음을 기념관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는 그는 가진 돈을 가장 잘 쓰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