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신평에 있는 석등을 찾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이 있다.
전에 ‘임실 신평 용암리 석등’이라 불렸던 안내판이 어디로 가버리고 ‘임실(任實) 진구사지(珍丘寺址) 석등(石燈)’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 찾아왔나?”
사방을 둘러보면 맞게 찾아온 것이다.
용암리 석등이 진구사 석등으로 바뀐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실시된 발굴 조사에서 ‘진구사(珍丘寺)’라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된 것이다. 이름을 찾았으니 제대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 석등슬치로에 있는 진구사지 석등은 오래 전인 1963년에 대한민국 보물 제267호로 지정받은 문화재다.
오늘 와서 다시 보니 전에 보았던 석등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보인다. 이만큼 큰 석등을 본 적이 없다. 높이만 보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라 한다. 가장 큰 것은 화엄사 앞 석등인데 진구사 석등이 윗부분만 유실되지 않았다면 크기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도 최고라 한다.

도대체 석등의 윗부분은 왜 없어졌을까? 제일 먼저 의심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도난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의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휩쓸어가던 때에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답게 생긴 석등을 보고 윗부분을 떼어가지 않았나 짐작된다. 다른 때 없어졌으면 한바탕 소동이 났을 것이고 구전으로라도 분실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구사는 7세기 중반에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한 보덕화상의 제자인 적멸과 의융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후반에 남원 실상사 출신의 관휴가 중창하였다 한다. 이때에 실상사 석등을 본 따 석등을 만들어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가져볼 만하다. 고려시대에는 왕자가 주석하기도 하였던 권력과 밀착된 사찰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숭유 정책에 의해 사찰이 정리되면서 폐사가 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추측되는 이야기는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이 세운 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고 이를 평정한 신라 조정에 의해 폐사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저 석등의 전체 모양과 규모에 맞게 윗부분을 아름답게 다듬어 올려놓으면 안 될까?”
내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올 것이 뻔한 질문을 했다.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왈,
“문화재 관리법에 따라 문서나 사진에 의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면 추측이나 짐작으로 문화재를 보수하거나 복원하는 일은 안 됩니다. 저 위의 터에 남아 있는 삼 층 석탑이 그냥 돌만 포개어 놓은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익산 미륵사지 석탑도 한쪽을 복원할 줄 몰라서 한쪽이 무너진 상태로 복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석등을 아무렇게나 멋대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절의 크기에 따라 석등의 크기도 비례하였다면 진구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을 것인가 짐작이 된다.
대부분 양쪽으로 놓여 있는데 한쪽만 남아 있는 절로 오르는 계단만 봐도 규모가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북창마을 전체가 절터였고 냇가 건너까지 소유지였다는 말도 있다.
오래 전 어느 때인가는 여기에 크고 우람한 절과 부속 건물들이 있었고 이 근방이 스님들로 북적였을 터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추측으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하게 알고 있을 석등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홀로 옛날의 영화를 회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