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이 사람대접을 받게 하고자 앞장섰던 동학 농민혁명의 지도자인 김개남 장군 묘소 앞에 서니 만감이 머리를 어지럽게 한다. 더욱이나 잡초만 무성한 생가터를 바라보니 가버리고 없는 그때 그 사림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 온다.
그들은 시대를 잘 타고났더라면 아무 일도 없이 농사를 지으며 그의 후손들도 배 두드려가며 태평가를 불렀을 것이다.
무엇이 농사일밖에 모르는 순박하던 농민들을 낫과 괭이를 들고 나서게 했는가?
그리고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하지 않아도 편히 살 수 있었던 김개남을 무엇이 혁명의 중심에 서게 하였는가?
어찌 보면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을 한 사람을 '장군'이라는 큰 타이틀을 갖게 한 시대적 시운을 타고나기도 한 사람이다.
김개남 장군 묘소는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생가인 고택지는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서 100m라고 했는데 두리번거려봐도 눈에 띄지를 않는다. 여기려니 하고 잡초가 욱어진 곳을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만큼 먼저 갔던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이 소리를 친다.
“성님, 여기 한 번 와 보시쇼.”
작은 밭뙈기 하나 숨어 있는 곳, 풀 속에 안내판이 숨어 있다.
거기에 김개남의 증손자인 김상기 씨의 증언으로 이곳이 생가터라 정하였다 한다. 김상기 씨는 증조할머니로부터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시신도 없이 가묘로 만들어진 김개남 장군 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다. 인내천의 깃발을 들고 백성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자 일어선 봉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은 대부분 정치가의 욕심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들이다. 결코 겉으로 내세우는 백성을 위하여 일어난 일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전라북도 사람들은 순박해서 세상을 뒤집는 일에 소극적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흔히 전라남도와 비교를 하면서 전남은 물고 늘어져서 자기 몫을 가져가는데 전북 사람들은 자기 몫을 찾아올 만큼 담대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동학 농민혁명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동학 농민혁명은 전북에서 일어나서 전국을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커다란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그 동기가 정의롭다. 사람을 하늘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그런 사람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일본이나 청나라 등의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동학 농민혁명이 성공을 하였더라면 세계 최초의 인내천 실천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 영주였으며 본래의 이름은 김기범이었다. 그것을 남쪽부터 개벽을 이룬다는 개남(開南)으로 바꾼 것이다. 그는 주관이 뚜렷하고 의지가 굳었으며 후퇴를 모르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동학농민군 중에서도 그가 머물렀던 태인에서 가장 열렬하게 봉기가 일어났던 것도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결코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 아니다. 당시의 태인 땅, 지금의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에서 부잣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서당에 다니면서도 사서삼경보다 병서를 즐겨 읽으며 호기를 키워왔다. 동네 아이들과 서리를 할 때도 참외나 수박서리를 한 게 아니고 돼지 서리를 할 정도로 통이 컸다.
그런 그였기에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앞장섰고 전봉준 다음가는 총관령이 되었다.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난 후 전주에서 퇴각할 때에 김개남은 전봉준과 손화중과는 다르게 전라좌도 쪽인 남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남원을 비롯해 임실, 진안, 장수, 무주 지역을 통괄했다. 그는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해 전라남도는 물론 영남의 서남부까지 통괄했다.
그는 남원에서 천민부대를 이끌었다. 그의 군대는 양반들에 의해 천대를 받던 노비, 백정, 장인, 재인, 승려들이었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갑오개혁에 의해 신분해방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군에 의해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남원 쪽에 자리 잡은 김개남은 따르는 사람들이 왕이라고까지 불렀다 한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에 김개남은 전봉준의 공주 공격에 나서지 않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장수, 금산을 거쳐 관군의 요충지였던 청주병영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청주병영 공격에 실패를 하고 패전 장수가 되어 회문산의 줄기인 정읍 산내면의 종성리 느티마을 매부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아랫마을에 살고 있던 옛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관군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두 살이었다.
그날이 12월 2일인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전봉준도 그날 그곳에서 20여 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피노리에서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고 김개남은 사나운 데다 부하들이 구출하러올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전주 초록바위 아래에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용감한 만큼 사납기도 했던 김계남은 장군이라는 칭호를 달고 고관대작들이 갖추고 있는 석물이 세워진 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태어나 자랐던 마을에 시신도 없는 무덤을 안고 있다.
한때 농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던 김제 만경 너른 들판 논둑에 심어져 있던 녹두에서 나온 파랑새의 노래에 이어 김개남을 향해 불러지던 노래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개남아, 개남아! 그 많던 군대 어디에 두고 홀로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