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시내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는 팔달로와 기린대로가 있다. 그런데 기린대로를 따라 옆으로 길게 난 좁은 도로가 하나 더 있다.
팔복동에서 추천대교를 건너 덕진으로 들어서서 왼편으로 난 작은 도로를 따라 시내로 진입하면 신호등을 훨씬 적게 받고 전주고등학교 교문 앞까지 올 수 있는 도로다. 이 도로가 바로 “권삼득로”다.
권삼득로는 전북 완주 용진 출신으로 조선 8 명창 중의 한 사람인(權三得 1771~1841)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도로다.

전주 주변 용진에 있는 조선 8대 명창인 권삼득의 생가
권삼득로는 전주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출발한다. 전주고등학교는 권삼득로 2번지다. 이곳을 출발하여 꽃색시들이 살던 선미촌을 지나 전에 지우산을 만들던 반촌마을을 지나간다. 모래내 시장을 멀찍이 바라보며 고갯길을 오르면 전주의 북쪽을 지키던 거북바위 앞을 지나간다. 고갯길을 내려가면 금암초등학교 앞을 지나서 전북은행 건물을 스쳐 지나간다.
전북대학교 울타리를 타고 가다가 보훈회관을 지나 덕진 공원을 끼고 가다 전북국악원을 지나가면 호반촌에 이른다. 전북국악원은 권삼득로 400번지다.
도립국악원 앞마당에 ‘국창 권삼득 기적비(國唱權三得紀蹟碑)’가 있다. 그리고 이 기적비문에 권삼득의 이력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권삼득로 주변 도립국악원에 서 있는 권삼득 기적비
조금 가면 전에 전북 도지사 관사였던 자리가 나온다. 한때는 대통령이 자고 가기까지 했던 자리다. 지금은 전라북도문학관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조금 더 가면 전주천이 돌아서 가는 추천이 나오는데 여기까지가 권삼득로다.
모두 4,6km의 제법 긴 도로다.
권삼득은 어떤 사람이기에 도로 이름을 ‘권삼득로’라고까지 했을까?
그는 국창(國唱)이다. 나라에서 인정한 소리꾼이다.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본명이 ‘권정’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최초의 명창이다.
양반 출신의 비가비광대(非可非廣大)로, 순조 임금 집권기의 전기 팔명창(八名唱)에 속하는 사람이다.
권삼득은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명창인 하한담(河漢譚)과 최선달(崔先達)의 후배로, 12살 때부터 그들에게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권삼득(權三得)은 본명이 인정(人政)인데 판소리 창본에는 권삼보, 권선달, 권생원으로 나오고, 광대가에는 권사인(權士仁)으로 나온다. 가중 호걸(歌中豪傑)이라 하였으며,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완주 용진에 있는 권삼득의 묘
권삼득은 권마성(勸馬聲) 소리를 응용한 판소리 선율인 ‘덜렁제’를 만들어 후대에 전했다.
도약 선법을 사용하는 덜렁제는 천 길을 솟아올라 만 길을 내리치듯 흥겹게 출렁이다 사뿐히 가라앉는 곡조로 일반 서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곡조다. 덜렁제는 매우 씩씩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며, 현재까지도 여러 소리 대목에 구사된다.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廣大歌)〉에서 "권생원(權生員) 사인(士仁) 씨는 천층절벽(千層絶壁) 불끈 솟아 만장폭포(萬丈瀑布) 월성궐렁 문기팔대(文起八代) 한퇴지(韓退之)"라 하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에 그의 성음을 비유한 바 있다.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는 권삼득의 별명도 그가 호탕하고 씩씩한 창법을 구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창극사』, 「권삼득」 조에서는 그의 소리에 대해 "곡조가 단순하면서도 세마치장단으로 일호차착(一毫差錯) 없이 소리 한바탕을 마치는 것이 타인이 미치지 못할 점일 뿐더러 그 천품의 점등한 고운 목청은 듣는 사람의 정신을 혼돈케 한다."고 하였다.

권삼득 묘 주변에 있는 권삼득이 소리를 연마한 소리굴
권삼득은 양반 출신 광대라 해서 특별히 '비가비'라고 부른다.
그는 어린 시절 성불암 소속의 사당패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판소리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고 공부에는 소홀하였다.
부친 권래언은 양반의 자제로서 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고 여겼다. 그러나 권삼득이 기어이 광대소리를 하겠다고 고집한 탓에 문중에서 멍석말이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권삼득이 죽기 전에 소리를 한 번 하게 해달라 하여 소리를 했는데 그가 부른 소리로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감동을 받아 결국 족보에서 이름을 빼고, 가문에서 쫓아냈다.
한때 족보에서 추방당했던 권삼득은 지금은 종친에서 가장 내세우는 존재가 되었다.
권삼득은 당시 판소리의 명창으로 꼽히던 하은담과 최선달을 만나 소리를 익히기 시작해 근교의 산과 계곡을 떠돌며 사람 소리뿐 아니라 새와 짐승, 귀신 소리까지 세 가지 소리를 두루 터득하라는 최선달의 말대로 삼득(三得)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된 수련을 통하여 자신만의 득음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름도 삼득(三得)이라 했다.
그는 구룡 폭포수 밑에서 피를 토하며 연습을 해서 자연의 소리를 뛰어넘은 득음을 하였다고 한다.
권삼득의 묘가 그의 생가에서 멀지 않은 뒷산에 모셔져 있다. 권삼득의 묘 근처에 소리를 연마했다는 소리 구멍이 있는데 그곳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
창극, 『비가비 명창 권삼득』은 양반 출신으로 당시 천하게 취급되었던 판소리의 길을 걸었던 전주 출신 초기 명창 권삼득의 생애와 그의 민중 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비가비’라는 말은 천민 출신이 아니라 양반 출신 소리꾼이라는 뜻이다. 양반으로서 소리를 하게 된 그의 고뇌와 예술혼을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특히 당시 민초들의 애환이 이 창극에 담긴 것이다.
이 창극은 ‘삼득 설렁제’라 하는 ‘제비 몰러 나간다’를 힘차게 부르며 마당판을 연다. 당시 양반 신분으로 광대 노릇이 용납되지 않아 멍석말이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소리 한 대목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득음에 이르는 고난의 과정과 전주대사습에 참가하는 등의 총 열두 장으로 풀어간다.
그런데 “권삼득” 하면 주로 “비가비 권삼득”이라고 한다. 비가비라는 말은 양반 출신의 소리꾼이라는 뜻이다.
양반 출신으로 하라는 서당 공부는 않고 상것들이나 하는 소리꾼을 하려 했으니 집안의 갈등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이를 이기고 소리꾼의 으뜸으로 국창이 되었으니 족보에서 빼버렸던 이름이 족보를 빛내는 귀한 사람이 된 것이다.
권삼득로는 그래서 좁은 길이지만 큰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