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판사 검사들이 욕을 많이 먹고 있다.
법과 양심에 따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이고 정치물이 들어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꺼려하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검찰 수사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제멋대로이고 판사의 판결도 사람에 따라 제멋대로다.
이러한 때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정부 수립 초창기의 어렵고 혼란스러울 때에도 굽힘이 없이 부정과 권력을 막아내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온 사람, 그가 바로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법조인으로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순창의 복흥 사람이다. 복흥이라면 전국적으로 골짜기로 이름난 곳이다. 흔히 쌍치-복흥을 묶어 깊은 산골짜기의 대명사처럼 말한다.
그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곳에 있다. 순창 읍내에서 복흥으로 가는 방법이 있고, 쌍치를 통하여 가는 방법이 있으며 정읍에서 내장산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다.
시골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자그마한 초가집이 그가 태어난 생가다. 집도 크지 않고 마당도 넓지 않다. 다만 집 앞의 들판이 제법 넓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학비를 대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헌데, 가인 김병로에 대한 취재는 생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한 군데 더 가봐야 합니다.”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이 한 마디 던진다.
그가 안내한 곳은 생가와 가까운 곳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진 팔각 단층 정자 낙덕정(樂德亭). 그곳이 가인 김병로가 어려서 자주 와서 놀던 곳이요 공부하던 곳이다.
김병로는 호남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종묘에 종사된 18현 중의 한 사람인 김인후의 16대 손이다. 낙덕정은 김인후의 가르침과 덕을 흠모하여 후손인 김노수가 1900년에 지은 정자다.
다른 정자와 다른 점은 놀거나 쉬기만 하는곳이 아니라 겨울에도 안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문이 만들어져 있고 바닥을 데울 수 있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곳 낙덕정에서 김병로도 공부를 했다.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조선 말기 고종 24년인 1887년 전북 순창군 복흥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흔히 외아들이 나약하여 의지나 끈기가 약하기 마련인데 그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로 사법부의 독립을 이끌어 낸 사람이다.
유년 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살았는데 그는 순창 복흥에서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생애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13세에 일찍 결혼을 하였다. 17세에 전우 선생에게 한 학을 배우고 18세에 담양의 일신학교에서 서양 선교사로부터 신학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에 순창의 용추사를 찾아온 최익현의 연설에 감화를 받아 이듬해에 7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순창읍 일인 보좌청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흔대학 법학과와 메이지대학 법학과에서 수학을 하였다.
귀국하여 경성 전수학교 보성 법률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19년에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을 하였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호하였으며 여러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하였다.
1923년에 김태영, 허헌, 김용무 등과 함께 서울에 ‘형사 공동연구회’를 만들었다. 이 모임은 일본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투사들을 돕고 그의 가족들까지 돌보아주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그가 변호사로 있으면서 맡았던 사건들 중에는 안창호, 여운영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광주 항일학생 운동, 6‧10 만세 운동, 김상옥 의사 사건, 광복단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등이 있다.
1927년 이상재 선생의 뒤를 이어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장이 되고 광주 학생 사건 때에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신간회가 해체되고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경기도 양주군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으며 일제가 제공하는 일체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 중앙 감찰위원장으로 참여하였으며 1946년 과도정부 시대에는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1953년에는 이어서 2대 대법원장을 맡았다. 그는 정년퇴임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 대법원장을 지냈는데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에도 그는 독재자가 정당한 법에 의해 행하는 것처럼 국민을 속여 조작하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으며 이를 막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오로지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한국전쟁 때에 다리를 절단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하여 근무를 하였으며 정치적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굳은 지조와 곧은 절개로 사법부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오늘날, 정치의 물을 먹고 권력에 아부하는 판사나 검사들이 본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김병로다.
순창 복흥의 산골에서 태어나 초창기의 우리나라 사법부의 나아갈 바른길을 닦았던 그가 태어난 생가는 전형적인 초가집이지만 여느 집과는 다른 서기가 서려 있는 곳이다.
사법부에 근무하게 된 사람들이 꼭 한 번 다녀가야 할 곳이 아닌가 한다.
이곳이 멀면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동상이라도 꼭 찾아가서 진심으로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하고 수사할 것을 다짐한 후에 임지로 갈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