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는 호남평야를 끼고 있는 기름진 고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김제 만경 평야다.
그래서 일찍부터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전주의 음식이 소문난 것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배경을 둘러싸고 있는 전주에서 근무하던 전라감사의 밥상에는 얼마나 많은 음식이 차려져 올라왔을까? 그리고 그것을 감사가 다 먹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우리가 집에서 간단하게 차려먹는 밥상도 다 먹지 못하는데 감사가 다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음식은 어떻게 했을까?
쌀 한 톨을 금덩이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버렸을 리는 만무하다.
전라감사의 밥상에서 물려 나오는 음식은 감사의 비서 격인 예방 비장이 먼저 먹고 그 아래로 물려서 하급 관리가 먹고 마지막에 부엌에서 일하는 부엌데기가 먹었다. 그래도 음식이 남으면 기름종이에 싸서 집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민가에 알려진 전주 음식의 표본이 되었다.
전주 음식은 전라감사의 밥상을 표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전라감사의 밥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야 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전라관찰사의 밥상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전에는 감사의 밥상을 기록으로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라관찰사의 밥상 기록도 외국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 전해진 것이지 우리나라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그 이후의 것이다.
전라관찰사의 밥상을 찬품극정결(饌品極精潔)이라 했다. 음식을 만들 때 극진한 정성을 다해 바르고 훌륭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금님을 대신하여 지방을 다스리는 고급관리이니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아침과 저녁으로 두 끼를 먹는 것이 표준이었다.
그러나 양반과 부자들은 하루 5번을 먹었다. 관찰사도 5번을 먹었다. 새벽에 죽을 먹고 아침, 점심, 저녁을 먹었으며 밤에는 야식을 했다.
관찰사 밥상은 감영 주방인 영고청에서 여러 사람들이 각각 일을 맡아서 했다. 여기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내아 부엌으로 가져가서 거기에서 다시 손을 보았다.
관찰사의 밥상을 진짓상이라 하는데 3탕 9첩이 표준밥상이었다.
밥상은 밥이 주식이고 반찬이 부식이 되는 차림으로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으로 구분하였다.
탕은 국을 말하는데 3가지 국이 있다는 말이며 9첩에서의 첩은 밥, 국, 장, 김치, 찌개, 찜, 전골 이외의 반찬을 말한다.
임금님의 수라상에는 12첩이었는데 민가에서는 9첩까지만 허용이 되어 관찰사도 9첩으로 하였다.
9첩의 9가지 반찬은 늘 같은 것만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때의 반찬을 예를 들면 무생채, 미나리나물, 숭어구이, 생채조림, 양하전, 죽순, 쇠고기자반, 새우젓, 어채였다.

관찰사가 밥을 먹을 때에는 기생 교육기관인 교방에서 파견된 기녀가 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수저를 올리고 반찬을 집어주었으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기도 하였다. 식사 때 반주가 곁들여지는 것은 물론이다.
관찰사의 밥상이 외부로 알려진 것은 1884년 11월 10일에 전라감영을 방문한 주한 미국공사관 해군 무관 클레이턴 포크에 의해서였다. 그는 전라감영에서 대접 받은 밥상의 음식 17가지를 그림으로 그려 번호를 매겨 여행일지에 자세히 기록을 했다.
그는 음식을 담은 접시 하나가 열 사람은 먹을 만큼의 양이었다고 말하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엄청난 밥상이었다고 말했다.
지금 전주의 한정식 집에 가서 상다리가 쓰러지도록 차려놓은 음식을 먹는 것은 전라감사보다 더 나은 밥상을 받는 것이다. 12첩이었던 임금님 수라상보다 더 풍성한 밥상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잘 먹고살면서 살기 힘들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호화롭게 잘 살고 있다고 해야 한다.
미국의 부자들도 우리나라의 평민들이 사는 것을 보고 놀란다. 미국의 부자보다 더 호화롭게 산다는 것이다.
밥맛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가끔씩 한정식 집에 가서 임금님 수라상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최고의 밥상으로 밥을 먹었음을 자부해 볼 일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