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군 쌍치면에서 제자를 길렀던 학당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지 군청 소재지에는 향교가 있고 거기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성현들과 우리나라 18현의 성현의 위패가 있다.
나는 향교에 가면 하서 김인후 선생의 위패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하서 김인후는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18현의 축에 낀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라 하였다.
아버지는 참봉 김령이며 어머니는 순창의 옥천 조 씨였다.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퇴계 이황과 함께 수학을 하였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조선 전기인 중종 때에 세자의 스승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를 지냈고 홍문관 부수찬, 제술관 등을 역임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세자인 인종의 스승이었다. 그만큼 학문과 인품을 갖춘 사람이었다.
중종 39년인 1544년 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새로운 왕인 인종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8개월 만에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같은 파평 윤 씨 사이에 대윤파(大尹派)와 소윤파(小尹派)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 암투로 빚어진 사화다.
이를 본 김인후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하였으며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명종 3년인 1548년에 순창 점암촌(鮎巖村)에 은거하면서 백방산 자락에 옛날에 유생들을 모아 경전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인 강학당(講學堂)을 짓고 학생 들을 가르쳤던 곳이 훈몽재(訓蒙齋)다. 점암촌은 하서 선생의 부인 여흥 윤씨의 고향으로 하서 선생은 이곳에서 1548년부터 약 2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훈몽재는 정조가 친히 존립 여부를 물어볼 정도로 유학(儒學)을 번창하게 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정치가이자 가사문학의 대가이기도한 송강 정철을 비롯하여 조희문, 양자징, 기효간, 변성은 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해동 유학의 산실이었다. 하서 김인문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사람으로 해동염계(海東濂溪)요 호남수사(湖南洙泗)였으며 1796년 정조에 의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되었는데 숙종 6년인 1680년 무렵에 김인후의 5대손인 김시서가 다시 짓고 자연당이라 이름 붙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인근에 어암서원을 건립하여 김인후와 김시서를 비롯한 선현들을 모셨으나 고종 4년인 1867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고 말았다. 훈몽재는 일제강점기에 중건되었는데 한국전쟁 때에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훈몽재는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며 부속 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삼연정 등과 함께 2009년에 복원한 것이다.
훈몽재 마당에는 큰 고인돌인 지석묘가 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4.9m이고 폭이 2.4m이며 높이가 1.4m에 이르는 큰 것이다. 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란 증거이며 이미 원시시대부터 훈몽재 터가 지도자가 머무르는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훈몽재 앞 냇가인 추령천변에는 대학암이라는 널찍한 바위가 있다. 서른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다. 이 바위를 대학암이라고 부른다. 하서 김인후가 제자들에게 대학을 가르치던 바위라 한다.
이곳에서 송강 정철도 하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인근의 석보마을 앞들을 정철배미라고 부르는데 정철의 공부답(工夫沓)이었다 한다.
지금 바위에 새겨진 대학암(大學巖) 글자는 송강 정철이 쓴 글씨라 한다.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 훈몽재 터는 현재 복원한 훈몽재 뒤쪽이었다. 여기에서 붓솔, 기와류, 자기류, 철제품, 석제품 등을 발견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순창군이 2003년부터 추진한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2009년 11월 현재의 위치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김인후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에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음으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도(道)와 기(氣)의 구분은 분명함으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항의 태극음양 일물설을 반대하고 기대승의 일설에 동조하였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하여 기대승의 주정설(主靜說)에 영향을 미쳤다.
김인후는 정조 20년인 1796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전국의 각 향교에 있는 대성전에 18현으로서 배향되어 있다.
하서 선생은 소쇄원의 48경의 풍치를 시로 읊었던 당대의 대가로 조선시대 최고의 연작 서경시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에 하서집(河西集) 등 10여 권의 시문집이 있다.
김인후는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제자들에게 보여주며 훈도(訓導)하였다.
천지중간유이인(天地中間有二人)
중니원기자양진(仲尼 元氣 紫陽眞)
잠심물향타기감(潛心勿向他趾感)
위차최퇴 일병신(慰此嶊頹一病身)
하늘 땅 그 중간에 두 사람이 계시나니
중니 공자는 원기라면 자양 주자는 참이로세
마음을 가라앉혀 딴 길로 가지 말고
좌절한 한 병든 몸을 위안해 주려무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