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사는 조선시대 관청의 손님이나 외국에서 온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정당(正堂)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익실이 있다. 익실은 본 건물의 왼쪽과 오른쪽에 딸린 방을 말한다.
새로 부임한 수령은 반드시 객사에 와서 참배를 해야 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국상 등 나라의 대사 때에도 이곳에서 궁궐을 향하여 절을 올렸다.
중앙관리가 순창을 찾아왔을 때에는 순창 객사에서 머물다 갔다.
전북유형문화제 제48호인 순창 객사는 현재 순창초등학교 교정과 순창 군청으로 이어져 있다. 지어진 때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영조 35년인 1759년에 중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상당히 앞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가운데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양 옆에 대청이 있었는데 왼쪽 서대청이 없어지고 오른쪽 동대청만 남아 있다.
가운데 있는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전하만세(殿下萬歲)라고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를 안치하고 있다.
동대청은 정면 5칸, 측면 2칸인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이곳은 숙소로 쓰인 곳이다.
원래는 중문과 외문이 있었으며 옆에 무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순창을 방문한 중앙 관리가 머물렀던 순창 객사
순창 객사는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2010년대까지 주변을 정비하는 사업을 여러 차례 실시하였다.
고종 42년인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읍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과 그의 제자 임병찬이 이곳에 진을 치고 항일 의병 본부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순창을 중심으로 정읍과 곡성을 장악하고 세를 불려나갔다. 그러나 고종의 군대 해산 권고 칙지가 내려오고 이들을 체포하러 온 군대가 대한제국군인 진위대였다. 전주관찰사가 순창을 포위했다. 순창 금산에는 전주진위대가 진을 치고, 순창 대동산에는 남원진위대가 진을 치고 대치했다.
일본을 타도하기 위하여 일으킨 의병인데 같은 조선사람들끼리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최익현과 임병찬은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순순히 항복을 해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두 사람은 이곳에서 체포되어 대마도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일본 곡식으로 지은 밥은 먹지 않겠다고 고집하다가 조선에서 가져온 밥을 먹었다고도 한다. 일설에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최익현은 풍토병으로 죽었다고도 하며 임병찬은 풀려나 돌아왔다. 그밖에도 순창의 의병장에 양춘영과 국동완이 있다.
학교 한쪽에 사각형의 돌비석이 하나 서있다. “순창 의병 항일 의적비”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허술한 기념물이지만 가치만큼은 학교 건물만큼 큰 것이다.
허술한 돌비석은 또 하나 있다. 작고 마모되어서 보잘 것 없는 돌덩이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 쓰여 있는 글자가 이렇다.
“해방 기념비”
그리고는 별다른 글자가 없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세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방의 기쁨이 가득 들어 있는 작지만 큰 돌인 것이다.
객사의 오른쪽에 있는 동대청에는 1914년에 새로 마련한 옥천지관(玉川之舘)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옥천(玉川)이라는 이름은 마한 시대부터 불려온 이름으로 가장 오래된 순창의 이름이다.
옥천이라는 이름은 순창에서 곳곳에 남아 있다. 지명에도 여기 저기 남아 있으며 어린이 교육의 장인 옥천초등학교가 있고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었던 옥천 사마재(司馬齋)가 있다.

순창의 교육 기관이었던 옥천 사마재
옥천 사마재는 조선시대 생원,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향촌 교육과 미풍양속을 습득하는 곳으로 지방 교육에 크게 기여한 곳이다.
순창의 옥천 사마재 원생들은 1636년 병자호란 때에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본래의 사마재는 임진왜란 때에 불타고 그 후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다시 지었는데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의 사마재는 1999년에 사마 후손들의 협조로 복원한 것이다.
순창은 산수가 좋고 사람들이 강직하여 충신 효자들이 많이 나온 지역이다. 그와 반면에 손님에 대한 대접도 잘 했던 지역이다. 순창 고추장이 유명해진 것은 예로부터 순창 부자들이 고추장을 넉넉히 담아두고 묵혀서 먹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순창 객사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도 순창 사람들의 사람을 잘 대접하는 넉넉한 마음의 여파가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