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형수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 인터뷰 글
강순희
그는 깡순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았다.
치열하게 살았다.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 인혁당 사건을 알고 있다.
제3공화국 군사독재에 반항하여 항거했던 일을 기억한다.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항거했던 많은 사람을 간첩단으로 몰아 목숨까지 빼앗았던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했던 사건이 “인혁당 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인민혁명당 사건’을 말한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군부독재 정치를 이어갔다. 한일국교회담에 대한 대학생들의 반대 투쟁이 정권퇴진운동으로 확산되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학생들의 항거 시위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이 배후 조종하여 국가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입건하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재판을 진행하여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이끌어 내고 사형 언도를 한 이튿날 새벽에 8명의 사형을 집행했던 사건이다.
1975년 4월 9일의 일이었다.
그날 강순희 남편 우홍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실제로 “인민혁명당”은 있지도 않았으며, ‘인혁당재건위원회’도 있지도 않았다.
사형당한 8명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중앙정보부가 학생 데모를 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조작한 간첩단 사건이었다.
그 후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그들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하였지만 억울하게 사형당한 그들의 한은 풀 길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이 책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의 이야기다.
올해 나이 93세인 강순희가 유시민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유시민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작가 유시민과 강순희의 인터뷰로 엮은 인혁당 관련 도서
“강순희 말하고 …… 유시민 듣다”
책 표지 윗머리에 쓰여 있는 글이다.
이 책은 유시민이 강순희를 인터뷰한 내용을 김세라 작가가 기록한 내용을 ‘4•9통일평화재단’이 발행한 책이다.
‘4•9통일평화재단’은 1975년 4월 9일에 인혁당 주동자로 몰려 사형을 당한 8명의 유가족이 후에 무죄 판결을 받고 받은 보상금으로 만든 재단법인 이름이다.
강순희.
그는 북만주에서 태어나 하얼빈에서 자라고 평안도 박천과 평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평양제1고녀를 다녔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가족이 모두 남한으로 피난을 왔다.
그는 무엇을 하든지 열정적으로 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 생활을 하면서 한국은행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는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노력하여 뜻을 이루었다. 한국은행 근무 당시의 강순희.
그에 대하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문정현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강순희 님은 참으로 고귀한 분입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정의와 진실을 외쳤고 좌절과 시련을 이겨낸 분입니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통 중에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박정희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조작한 인혁당 사건에 대하여 증거물을 가지고 정치, 사회, 언론, 종교계를 찾아다니며 외쳤고 세상에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했고 마침내 무죄의 판결을 이끌어 내게 했던 사람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인혁당 사건을 조작된 사건이라고 증언하는 책이 아니다.
강순희라는 한 인간에 대한 인생 전기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서다.
남편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슬픔과 절망에 갇히지 않고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강순희라는 한 인간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강순희는 남편의 누명을 벗겨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달려가면서도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다.
4명의 자녀를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했고 인혁당 동지들을 만나면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유원지를 데리고 갔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는 경찰서나 중앙정보부에 조사받으러 갈 때나, 면회를 갈 때 선글라스를 쓰고 멋진 옷을 입고 갔다. 결코 사정하러 가거나 비굴하게 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조사관 앞에서 당당하게 큰소리를 쳤다.

강순희, 그는 중앙정보부 조사받으러 갈 때도 선글라스를 끼고 옷을 폼나게 입고 갔다.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린다.’
이 말은 자유와 평화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깨우치지 못했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나온 5월의 노래에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강순희는 남편 우홍선으로부터 평화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알고 사랑을 알았다.
강순희는 자기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간 사람이다.
북한에서 권력자나 특권층 자녀가 다니는 명문학교 ‘평양제1고녀’에 입학시험으로 보는 면접시험에서 스트라이크에 참가한 것에 대하여 질문할 때, 한번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잘못을 깨닫고 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따져서 합격을 이끌어냈다.
한국은행 시험을 볼 때도 모르는 문제가 있더라도 글씨라도 깨끗하게 답안지를 작성해야겠다고 하여 합격하였다.
경찰서나 중앙정보부에 조사받으러 갈 때도 멋지게 차려입고 가서 조사관에게 따졌다. 사형수 아내라고 무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느냐는 질문에 남편을 만나 연애할 때였다고 대답했다.
남들이 겪지 못할 지독한 고생을 하였는데도 사랑과 낭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상하는 우홍선과의 연애 시절 사진
그는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지나간 일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짧은 행복과 긴 고난 속에 있었지만 과거나 불행한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밝은 표정을 되찾아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법원을 들락거릴 때도 틈틈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관광지에도 갔다. 한 가지 일에 쏠려 다른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주어진 자기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 사람이다.
힘들고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건 앞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억울함과 분노, 절망감과 상실감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강순희라는 한 인간의 위대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아흔 살을 넘기고도 요가를 하고 수영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누려왔다.
강순희와 인터뷰를 한 유시민 작가는 책 말미에 그는 ‘최선을 다해 운명을 살아내는 사람이며 철학자’라고 평했다. 93세의 나이로 인생과 세상사에 대한 세부 정보를 잃으면서도 삶의 큰 원칙은 더 확고하게 다져나가는 사람이라 했다.
강순희는 유시민과의 인터뷰를 통해 세 살 때의 만주 하얼빈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평양에서의 학창 시절, 한국은행 시절, 우홍선의 아내로서의 아내, 부정한 독재자와 싸우는 투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실제 있었던 그대로 구술을 통해 기억으로 재구성한 강순희를 만들어낸 것이다.

93세의 나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는 강순희
아흔세 살의 강순희, 그는 말한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가 힘껏 노력하고 살았으니까 오늘 밤에 죽어도 괜찮다. 주어진 운명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다는 것으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