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 걱정 있는 자 포대화상 앞에 서라
전주의 동쪽 인후공원 도당산 남쪽 아늑한 골짜기에 대광사(大光寺)라는 절이 있다.
그 절 마당 한쪽에 언제 보아도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좌상이 큰 돌로 조각되어 있다.
거기에 포대화상에 대한 설명이 있고 그 아래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도당산 아래 대광사에 포대화상 대성존의 존상을 모시었으니 신남 신녀님들께서 이곳에 오셔서 참배하고 기도하며 날로 날로 웃으니 만복이 찾아오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소망합니다.”
포대(布袋)는 자루를 뜻하며 화상(和尙)은 수행을 많이 한 스님을 뜻한다.
포대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포대화상은 당나라 말기부터 오대십국 시대까지 명주(지금의 중국 저장성 낭보시)에 살았다는 전설적인 스님이다.
포대화상은 널브러지게 주저앉아서 큰 배를 내놓고 근심 걱정이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는 크게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누구든지 그 앞에 서면 근심 걱정이 싹 달아나 버릴 만큼 태평한 모습이다.

포대화상은 중국의 명주 봉화 사람이라고도 하고 장정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의 오대(五代)시대에 후량의 고승으로 성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사람이다. 단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를 장정자(長汀子)라 했다.
사람들은 미륵보살의 화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몸은 뚱뚱하고 배가 불룩 나왔으며 눈썹이 유난히 길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닌다. 떠돌아다니다가 어려운 중생을 만나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중국 민간에서는 혜비수, 대흑천, 비사문천, 수노인, 복록수, 변재천과 더불어 칠복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 포대화상은 실제의 인물이고 나머지는 실제 인물은 아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모습을 그리는 풍습이 번졌으며 일본이나 베트남까지 포대화상을 그리는 풍습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중기에 한시각이라는 화가가 그린 선종화가 가장 오래된 포대화상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 김득신이 그린 포대화상의 그림도 있다.
우리나라의 각지에 포대화상의 그림이나 조각품들이 많이 있다.
포대화상은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밤마다 부처를 보듬고 자고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일어나건 앉건 서로 붙어 다니며 말을 하건 하지 않건 같이 머물고 같이 눕는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동냥을 하며 살았는데 음식은 주는 대로 포대에다 담아서 먹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가르침을 달라고 하면 포대를 내려놓으며 “네가 가진 짐을 이렇게 내려놓으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 포대를 짊어지면 왜 도로 짐을 지느냐 하면 “이것은 짐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깨닫는 자는 깨닫고 못 깨닫는 자는 못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