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끔은 학교 교사들이 욕을 먹을 때가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 공주에서 교사 노릇을 하던 일본인 가루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가루베 그놈은 정말 나쁜 놈이다.”
그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기에 그토록 욕을 먹고 있는 것일까?
가루베 지온(1897~1970)은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 문학부의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이다. 역사나 고고학에 대해서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골동품상을 하였던 관계로 유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한국의 낭랑 문화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평양으로 왔다. 1925년 평양숭실전문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낭랑문화에 대한 연구는 이미 다른 일본인들이 다해서 자기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는데 공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을 알고 공주고보 교사로 부임을 하였다.
그는 공주에 오자 공주 일대의 고분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공주는 손을 대지 않은 고분이 즐비하였다. 그는 쾌재를 부르며 공주에 온지 한 달도 안 되어 이미 도굴로 노출된 송산리 고분 1호부터 4호까지 찾아가서 기웃거렸다.
그는 학교에 향토관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숙제로 유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당시에 이미 고분을 도굴하는 일을 일반인들도 하고 있을 때라 괜찮은 유물들이 나왔다. 가루베는 값이 나갈만한 것은 감추고 나머지만 학교 향토관에 진열했다.

송산리 고분 분포도
그는 일본어를 모르는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어 교사였다. 교재 연구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었기에 온통 고분 발굴에 정신을 쏟았다.
어느 날, 학부모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밭에서 일을 하는데 괭이질을 하면 쿵쿵거린다는 제보를 해줬다. 가루베는 얼른 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밭을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1933년 7월에 드디어 백제 고분 제6호의 배수구를 찾아내었다.
이것이 ‘송산리 벽화고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아서 천정과 벽에 청룡과 백호, 해와 달을 그려 넣은 우아하고 부드러운 백제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고분이었다.
이 정도의 벽을 치장할 정도면 왕의 무덤이 틀림없다. 그 안에 각종 유물이 들어 있을 것은 너무도 뻔한 것이다. 그러나 가루베는 얼마 후 조선총독부에 신고를 했는데 안이 깔끔하게 치워진 상태로 신고를 했다. 담당자인 일본인 전문가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도굴꾼이 손을 댔더라도 이렇게 깨끗이 치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닌 그는 괭이나 호미로 아무렇게나 긁어서 유물을 담고 청소까지 해버렸다. 발뺌을 하기 위한 것이다.

송산리 고분 6호의 찬란한 내부 벽 장식
이렇게 하여 고분 6호는 가루베에 의해 유물은 탈취 당하고 누구의 무덤이며 어떤 유물이 있었는지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그 후 대동여고(지금의 대전여고) 교감을 거쳐 강경여중 교장을 지냈다. 그가 이사를 갈 때마다 유물을 한 트럭씩 싣고 다녔다.
해방이 되자 재빨리 유물을 싣고 대구로 가서 대구의 유물 약탈자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합류한 뒤 유물을 일본으로 밀반출했다.
그가 고분을 파헤쳐서 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강경의 유지들이 해방이 되자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벌써 유물을 빼돌린 뒤였다.
그는 일본에 가서 백제 유물에 대한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대학 교수노릇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백제 통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가 손을 댄 고분이 1,000여 기가 넘는다 했다. 전문가들도 놀랄 일이라 했다. 밤낮으로 무덤을 파헤친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흔적을 없애버려 출처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최소한의 절차나 양심도 없이 마구 파헤쳐버린 무식한 도굴꾼에 의해 백제의 상당 기간의 역사의 흔적들이 사라지고 망가뜨려진 결과를 낳았다.
신라의 왕릉들은 잘 보존된 반면 백제의 왕릉들은 신라군에 의해 파괴되고 망가져 산야에 묻혀버린 데다 일본인들에 의해 더 망가져 망국의 한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