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오래전부터 전라도 사람들의 꿈의 도시였다.
신라시대부터 전라도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한양,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시였다.
그러기에 전주를 향한 고갯길이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전주 장날에는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넘어 장터로 모여들었다.
동학혁명 때는 동학농민군이 밀물처럼 전주 서쪽 고갯길을 넘어 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마을마다 전주를 향한 고갯길이 있고 그 고개를 넘어 전주로 간 사람들이 명절이면 신사 옷 쫙 빼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신고 자가용 타고 선물 보따리 들고 내리면 부러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전주로 나가면 성공의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전주가 가까워지면 넘는 고갯길이 있었다.
지금은 깎고 밀어내어 낮은 고갯길이 되었지만 본래는 높고 구불구불 좁은 길이었다.
이제 그 고개를 넘어가 보자.
전주 가까이 있는 고갯길
1. 용머리고개
전주를 대표하는 고개는 용머리고개다.
전주를 향해 김제, 부안, 고창 사람들이 넘어오던 고개였다.
용머리고개는 전주의 본산지인 완산동을 동서로 갈라놓은 고개다. 고개 동쪽은 동완산동이고 서쪽은 서완산동이다.
전주를 상징하는 산인 완산칠봉 가운데 용두봉이 있다.
그 용두봉에서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서신동까지 용처럼 주욱 벋어나간 산줄기가 화산이다. 화산은 별개의 산이라기보다는 완산의 줄기다.
용머리 고개는 용의 목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전주 땅의 기운을 끊기 위하여 용의 목을 쳐서 길을 내었다.
뿐만 아니라 용이 잠들지 못하고 피곤하도록 용머리고개에 대장간을 만들었다.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날카롭고 시끄러워 용이 제 기운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전에 수십 개였던 대장간은 지금은 3개가 남아 있는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용머리고개 대장간
2. 강당재
강당재는 용머리 고개가 뚫리기 전에 전주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전주를 향해 들어오던 길이었다.
완산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난 산길인데 전에 얼음을 모아두었던 빙고리 길을 올라 강당길로 이어지는 고갯길이다.
최초로 예수병원이 있던 자리인 지금의 엠마오 사랑병원을 지나 중화산동 현대아파트에 이르는 제법 가파른 고갯길이다.
최초의 예수병원이 있었고 초기의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전북지역을 선교했던 마로덕 선교사가 머물던 집이 지금도 있고 고개 위에는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묘들이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걸어서 이 고개를 넘어 다닌다.

강당재에 세워졌던 최초의 예수병원
3. 선너머 고개
다가동에서 다가교를 건너 신흥학교 앞을 지나 지금의 예수병원 뒤쪽으로 넘어 중화산동으로 가는 고갯길이다.
경기전 가까이 있던 서원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러워 어진을 모신 곳이 경건치 못하다고 서쪽 화산 너머로 옮기고 화산서원이라 불렀다.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드나들던 고개가 선너머 고갯길이다.
화산 너머 서원이 있다 하여 ‘선너머’라 불렀다.
지금도 ‘선너머로’라는 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원은 없어지고 화산서원비만 남아 있다.

선너머에 있는 화산서원 비
4. 장고개
어은골에 있는 고갯길을 말한다. 서신동 사람들이 고개를 넘어 전주로 오가던 길이다.
고개를 넘으면 장터가 보였다 하여 장고개라 불렀다.
5. 소리재(솔개재)
소양 금상골 사람들이 전주 안덕원으로 넘어오던 고개다.
한국전쟁 때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끌어다 죽여 암매장한 곳이다.
그곳에 “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희생지”에 대한 안내판이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 지원단장의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4일부터 7월 20일까지 전주형무소 제소자 중 여순사건 연루 혐의자와 좌익 사상자 1,500여 명을 인민군이 남하하면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곳 산정동 솔개재를 비롯하여 완산구 효자동 공동묘지, 황방산, 건지산, 전주농고 동쪽 문 야산 기슭, 현 한국전력 자리 등에서 국군 제7사단 3연대 및 해병대에 의해 적법 절차 없이 집단학살 되어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곳은 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의 집단학살 유해 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안내판만 서있다.

소리재에 서 있는 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희생지 안내판
6. 마당재
전에 용진면이었던 아중리 사람들이 시내로 나오던 기린봉 아래 있던 고갯길이다.
이곳은 불교에서 말하는 ‘야단법석’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넓은 들판인 야외(野外)에 단(壇)을 만들어 놓은 야단(野壇)과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곳인 법석(法席)의 합성어다. 넓은 곳에서 스님의 설법을 듣던 곳을 말한다. 기린봉에 있는 선린사와 승암산에 있는 동고사 마당이 좁아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어 이곳 마당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던 곳이다.
마당재는 이곳이 넓어서 재(齋)를 지낼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견훤이 궁궐터로 생각했던 물왕멀과 가까운 곳이다.
부근에 진안사거리가 있다. 진안 사람들이 전주를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아중로가 뚫려 평지가 되어 있다.
7. 보광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서학동에서 구이 평촌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데 이미 백제시대부터 사람들이 다니던 고갯길이었다.
아직도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개다.
평촌에 있었던 사찰 보광사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절이었다. 전주의 불자들이 이 고개를 넘어 보광사에 가던 길이다.
절 이름을 그대로 따서 고개 이름으로 삼은 특유한 고개다.
전북 전주시 서서학동 흑석골에서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상·하보 마을로 넘어가는 보광재 옛길은 더 멀리는 임실군 신덕으로 향하는 불재까지 연결된 교통로였다.
보광재는 남고산(273m), 기린봉(271m), 완산칠봉의 장군봉(185m)보다 더 높은 전주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이다.
전주시미래유산 제39호로 지정된 고갯길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보광재 길
8. 황방산 고개
서신동, 효자동 사람들이 황방산을 넘어가던 고갯길이다.
이 고갯길에는 수많은 탑과 소금단지가 있는 일원사가 있는 길이다.
고갯길을 넘어가면 전주의 서쪽을 지키던 사찰인 서고사가 있다.
9. 노루목 고개
상관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좁은목과 노루목 고개가 있었다.
좁은목은 산 아래를 돌아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이고 노루목 고개는 산을 넘어 서학동 쪽으로 들어오는 길이다.
노루 한 마리가 물을 마시다가 문득 바라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놀라서 달아난 곳이 노루목 고개라 하기도 한다. 호랑이가 바라본 곳이 발리산 한벽루가 서 있는 곳이었다. 호랑이의 기를 꺾기 위하여 일본 사람들이 굴을 뚫어 기찻길을 냈다. 한벽루 터널이다.
전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고갯길
1. 쑥고개
전주 서부와 김제 금구를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김제, 부안 고창 사람들이 전주를 올 때 넘던 고갯길이었다.
지금의 넓은 도로인 쑥고갯길은 옛날의 고갯길은 아니다.
옛 쑥고개 길이 구불구불 지금도 있다.

다시 만들어진 쑥고개 도로
2. 불재
불재는 완주군 구이면과 임실군 신덕면 사이에 있는 경각산을 넘는 고갯길이다.
경각산은 고래가 물을 뿜는 모양에서 나온 말이다.
임실에 부대가 들어서면서 임실 관촌과 전주를 잇는 춘향로가 막혔을 경우를 대비하여 길을 넓혀 놓은 고개다.
‘불재(火峙)’라는 이름은 풍수지리적으로 “불무혈(佛舞穴)”이 있는 자리라 하여 붙여졌다는 전설이 있다.
불재는 임실군 운암면에서 완주군 구이면을 남북으로 잇는 도로인데 운암에서 구이를 동서로 잇는 불재가 하나 더 있다. 둘 다 불재라 불린다.
3. 슬치재
임실, 남원에서 전주로 오던 사람들이 넘어야 할 고갯길이다.
고개를 중심으로 ‘관’ 자가 들어 있는 지명이 3곳이 있다. 전주 쪽에서 슬치로 가는 고개 아래 ‘남관’이 있다. 이곳에 남관진(南關鎭)이 있었고 군대가 주둔했으며 군사들이 타고 다닐 말을 대량으로 기르고 있었다.
이곳이 능히 1만 마리의 말을 숨겨놓을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만마관(萬馬關)‘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마자마을이 있고 마자길이 있다. 만마관에 관한 비석이 도로변에 서 있다.
고개 너머에는 ’관촌(關村)‘이 있다. 관청이 있던 곳이다.
남관 위에 ’상관(上關)‘이 있다. 남관의 위쪽이라는 말이다.
이런 곳이기에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무서워서 넘어오지 못하고 왜망실로 돌아서 전주로 들어오려다 왜망실에서 일망타진되었고 남은 사람들이 전주 김씨 성을 얻어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슬치재 관문
4. 곰치재
진안 사람들이 전주를 향해 넘어오던 고갯길이다.
그 후 모래재와 보룡재에 찻길이 뚫려 옛길이 되었다.
지금도 한적한 산길로 남아 있다.
5. 위봉재
완주군 동상면에서 전주를 향해 넘어오던 고갯길이다.
동상면 수만리와 소양면 대흥리를 잇는 고개다. 고개 위에 위봉산성이 있고 위봉사와 위봉폭포가 있다. 고개 아래에는 송광사가 있다.
전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전주로 오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는 경기전의 사고를 위봉산성으로 옮겼던 길이기도 하다.
전주를 향한 고개에는 내 고향 임실군 삼계면 봉현리 숙호부락 동쪽의 ‘황정지고개’도 하나 들어가야 한다.
그곳 사람들이 전주를 향하여 집을 나서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이기 때문이다. 그 고개를 넘어갔던 사람들이 전주도 가고 서울도 가서 잘들 살았다. 주로 전주의 남쪽이었던 노송동에서 많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