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거리를 다시 걷는다.
반세기도 더 된 그때의 기분으로 걷는다.
동문거리는 추억의 거리다.
반세기 전의 전주의 번화가 1번지는 동문거리였다.
중‧고등학생 시절, 이곳에 가면 사람들이 빽빽하게 차있었고 각종 가게들이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빵집. 풀빵집도 있었지만 팥이 단단하게 꽉 차있는 호야빵집이었다. 시골뜨기가 혼자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시 사는 아이가 들어가자고 해야 겨우 따라서 들어갔던 곳이었다.
당시의 눈으로는 휘황찬란한 거리였다. 가게의 간판 글씨도 멋들어진 글씨였다. 남노송동에서 철길을 건너면 관선동 파출소가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팔달로 쪽으로 곧게 벋은 길이 동문거리였다. 팔달로를 지나 공보관이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거리가 온통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더욱이나 팔달로 사거리에는 휘황찬란한 내온사인이 번쩍거려 전주의 명물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탑을 미원탑이라 불렀고 그 사거리는 미원탑 사거리라 불렀다.
지금 우체국이 있는 사거리의 가정회관 자리에는 공보관이 있었다. 미국 공보관이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문화 행사를 했다. 지금 금암동의 안디옥 교회에서 예배당으로 쓰고 있는 둥근 양철지붕의 건물은 그때에 미국 공보관 전시장 건물이었다.
지금의 팔달로와 병무청에서 벋어나간 충장로가 마주치는 팔달로 사거리는 그때는 없었고 그 아래에 있는 동문길과 팔달로가 마주치는 곳이 전주의 번화가였다.
전주에 갔다 온 시골 사람이 동문거리를 가보지 않으면 전주 갔다 왔다는 말을 못 했고 번쩍번쩍 빛을 내는 미원탑을 보지 못하고 오면 볼 것을 다 못 보고 온 사람이라 했다.
당시에는 시내버스는 팔달로만 다녔다. 평화동 장승배기에서 덕진까지 다니는 시내버스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서 다녔다. 덕진 종합경기장에서 제44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에 학생들이 마스게임 연습한다고 매일같이 종합경기장을 드나들었는데 모두가 걸어서 다녔다.
동문거리에는 찻집이 있었고 술집도 있었다. 그때는 찻집이라 말하지 않고 다방이라 불렀다. 학생이 다방이나 술집을 드나들었다가는 여지없는 정학감이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던 학생부 담당 선생님께 발각이 되면 용서가 없었다. 그래도 용감하게 술집을 드나드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들키게 생기면 쥐새끼처럼 도망을 잘 쳤다.

반세기 전에도 있었던 삼양다방이 보이는 동문거리 풍경
그런데 학생이 다방을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유명한 시인이 시화전을 열 때였다. 그때만은 다방에 학생 출입이 허용되었다.
김해강, 신석정, 허소라, 이운용, 백양촌, 이철균 시인들은 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시화전을 빌미 삼아 다방이 어떤 곳인지 들어가 볼 수가 있었다. 그때의 삼양다방은 지금도 있어 전주 미래유산으로 지정을 받기도 했다.
동문거리에는 책방이 많았다. 그런데 헌책방이 훨씬 많았다. 부모님께 새 책 값을 타다가 동문거리에 가서 헌책을 사고 남은 돈으로 호야빵을 사먹을 줄 아는 학생은 사회성이 높은 아이였고 트인 학생이었다.
필자는 트인 학생을 짝꿍으로 둔 덕택에 다방엘 한 번 들어가 보았고 교복을 뒤집어 입고 ‘학생 입장 불가’ 영화를 몇 번 보았다.
동문거리에는 양복점이나 양장점이 많았다. 남학생, 여학생들의 교복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인 2월이 되면 교복을 맞추기 위하여 동문거리로 나왔다. 당시에 중학생 교복값이 500원 정도였다. 1학년 신입생들은 무조건 크게 맞추었다. 2학년이나 3학년 때까지 입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멋쟁이 학생들은 옷으로는 멋을 못 내니까 모자로 멋을 내었다. 챙을 길게 만든다거나 둥글게 말아서 썼다. 어떤 학생들은 모자 안의 천을 뜯어내고 눈까지 깊이 쓰고 다니기도 했다.
불량학생 적발 시에도 학생부 담당 선생님들은 모자부터 벗겼다. 대부분이 모자 안쪽에 자기 이름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꼼짝 못하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어 모자를 돌려받았다. 모자를 돌려받는다는 것은 곧 용서를 의미하기도 했다.
지금도 전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 중 동문거리를 못 잊어 전주에 오면 꼭 동문거리를 들렀다 가는 사람이 있다. 호야빵집에서 여학생들과 빵을 같이 먹었는데 빵값을 자기가 냈다고 자랑을 하는 사람이다.
동문거리는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노폭은 그대로다. 그때는 상당히 넓은 거리였는데 지금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다. 그래도 그리운 추억만은 8차선 대로보다 더 차고 넘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