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에 다시 서서

김제 금산 원평의 구미란 전투 전적지

작성일 : 2022-10-25 21:24 수정일 : 2022-10-26 09:02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역사의 현장에 선다는 것은 아프고 두렵고 외로운 일이다. 그날의 치열했던 역사적 사건은 흔적도 없고 잡풀만 무성한데 그날의 함성은 어디 가고 적막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곳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든가 의구심마저 든다.

 

김제시 금산면 원평의 구미란 전투 현장에 서면 그런 생각들이 더 든다. 이곳에서 신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을 맞아 엊그제까지 농사일에 매달리던 동학농민군이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신무기 앞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물러서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앞서서 가던 사람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도 칼이나 창을 들고 달려 나갔다는 이야기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아보지 못한 한들이 그렇게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용기로 표출되었으리라.

 

구미란 전투는 1894년 12월 21일(당시 음력 11월 25일) 김제시 금산면 원평 지역에 머물러 있던 전봉준 장군 휘하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대를 앞세운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였다. 이 싸움에서 동학농민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패하였다.

 

하루 종일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으로 보아 치열한 싸움이었는데 피난을 갔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시체가 즐비하였고 개들이 사람의 몸의 일부를 물고 다녔다고 하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 눈물로 시체들을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곳이 127년 전 구미란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이 가리키는 작은 산이다.  

잡풀이 무성한 이곳이 금산면 용호리 구미마을 뒷산인데 그때에 묻은 시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이나 관군은 죽은 시신들을 잘 처리했을 것이고 역적이 된 동학농민군들의 시신은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거기에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러가 버려 그들의 시신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앞세운 관군과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던 구미란 전적지

 

구미란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공주 싸움에서 패하고 물러나서 이곳에서 다시 집결한 후에 벌어진 싸움이다. 당시에 이곳에 동학농민군이 6,000명에서 7,00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날의 전투에 대하여 기록을 한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鎽陣騰錄)을 보면 엄동설한에 원평 장터 옛길 구미란에서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포를 쏘고 총을 쏘며 찌르고 베는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후에 관군이 거두어들인 동학농민군이 소유하고 있던 전리품이 쌀 500섬, 돈 3,000냥, 탄환 7섬, 화약 5궤짝, 칼과 창 200자루 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동학농민군이 전투에 참가하였다고 보아진다.

 

현재 구미란 전적지에는 십여 기의 동학농민군의 묘가 남아 있고 인근에는 1893년 동학교도 만여 명이 모였던 금구 원평 집회 터와 동학군들이 사용하던 원평 집강소가 있다.

 

김제시에서는 해마다 12월 11일이면 사단법인 ‘김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이곳 구미란 전적지에서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린다.

또한 국가에서 동학농민군의 최초의 전투였던 황토현 전투가 벌어졌던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용만 기자 ym6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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