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여고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 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에게도 아련한 고교시절을 회상케 했던 가요 ‘여고 시절’은 1970년대의 가요판을 평정할 만큼 대히트곡이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수미는 그해에 신인상을 뛰어넘어 십대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수없이 오고 갔을 여고생 거리 중 한옥마을 경기전길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다른 학교는 이리저리 학교터가 옮겨 다녀서 옛날의 여고생 거리가 아니지만 이곳에 있는 성심여중‧고만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학교길이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심여중‧고로 가는 길은 한옥마을 한가운데인 경기전 동쪽 길과 이어져 있다. 이 길은 전주의 옛 중심지였던 동문사거리에서 출발하여 전주천변까지 이어지는 경기전길이다.
이 길이 성심여중‧고 교문 앞으로 이어진다. 옆에 남문 성당이 있고 풍남문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국 3대 시장이었던 남문시장이 있다. 길 건너에는 향교와 오목대와 자만동이 있다. 전주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교동 중심지다.
“아침나절 들려오는 삼종 소리에 흩어진 마음도 가다듬어서…”
한 갑자(60년)가 지나간 그 시절 학교에는 ‘교가’가 따로 있고 ‘찬가’라는 것이 있었다. 이 노래는 성심여중‧고 찬가인데 필자가 중학교 때에 사촌 누나에게서 배운 노래다. 그가 자주 불렀기에 저절로 배워진 노래다.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흘러간 뒤 어떤 자리에서 성심여고 출신인 사람에게 이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기도 하였다.
성심여중‧고 교문이 있는 경기전길은 수많은 여학생들의 발길을 안고 있는 길이다. 학교에 오갈 때만 아껴 신었던 여학생들의 운동화 발자국들이 무수히 찍혀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여학생들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던 남학생들의 발자국도 함께 찍혀 있다. 세라복이라고 불렀던 해군들이 입던 군복과 비슷한 성심여고 교복은 먼 곳에서 보아도 금방 눈에 띄었고 교복이 예쁘다고 전국체육대회 때는 기수로 나서기도 하였다.
천주교 재단인 해성학원의 계통인 성심여중‧고는 1926년 라크루 신부에 의해 해성강습소가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된다.
1932년에는 이춘화 씨가 학교 터를 기증하고 교실을 신축하여 기증한다. 그리하여 1938년 ‘해성심상 소학교가 개교된다. 그 후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해방이 되자 1946년 10월에 ‘성심여학원’이 개교되었고 1948년 9월 16일, ‘전주성심여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1952년에는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가 개교를 하였다. 그 후 1970년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분리 운영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 갔지만 학교 길에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들이 있다. 학교 교문 옆에서 학교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집 한 채다. 자세히 보면 학교 울타리 안이 아니라 울타리 밖이다. ‘ㄷ’ 자로 둘러싸여 있는 개인 집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학교 마당에 있는 집을 팔지 않고 버티어 온 것일까?
“학교 안에 있는 집 한 채를 어찌 그렇게 팔지 않고 버티고 있었을까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질문을 잘하는 자칭 ‘요상한 동생’이라 하는 그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이다.
“똥고집 아닐까?”
제대로 답을 내 놓을 수 없음을 예상한 나는 답을 얼른 들으려고 대강 대답을 해버린다. 천 선생이 들려준 집을 팔지 않고 지켜온 할머니의 사연은 애절하다.

학교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는 개인집 한 채 앞 거리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들이 징병되어 군대에 가게 되었다. 그 후 전쟁이 끝났는데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망통지서가 온 것도 아니었다. 실종이 된 것이다. 행여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집을 찾아올 것인데 이사를 가버리면 어떻게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아들을 기다리기 위하여 이사를 가지 않고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언 70년이 지나갔다. 어머니도 아들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후손들도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이 골목을 지켜온 가게와 집들이 있다. 일본 시대 다다미 집도 있고 환갑을 넘긴 가게들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삼원한약방이다.
이 삼원한약방도 골목골목 모르는 것이 없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 선생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천 선생이 닫혀 있는 대문을 손으로 밀자 ‘삐그덕’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잘 아는 집을 들어가듯 들어간다. 대문간에 ‘서울대학교 동창회보’가 배달되어 있다. 약방 주인이 서울대 출신이란다.
약방 주인은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지금도 약을 지어주고 신수를 봐준다.
목소리가 쩡쩡하다. 기자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기자들에게 월급을 받느냐고 묻는단다. 월급을 못 받는다고 하면 그런 일 당장 때려치우고 다른 데 취직을 하라고 야단을 친단다. 자기가 평생을 매달릴 일을 찾아서 하라고 권한단다.
부안 출신인데 부안에서 잘 나가던 때에 정치에 입문하려다 좌절되자 이곳으로 옮겨와 한약방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단다. 한약뿐만 아니라 사주나 신수도 보아주고 작명도 해준단다. 또 한 사람의 경기전길 지킴이를 만난 것이다.
“수많은 세월이 말없이 흘러…….”
지금까지도 수많은 여고생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이 노래, ‘여고 시절’
특별히 오래도록 한 골목을 지켜온 성심여중‧고 등하교 길이었던 한옥마을 경기전 길은 다른 학교 길보다 더 많은 추억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많은 여학생들의 발자국을 쌓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