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인 전주 강암서예관에서 열려
전라북도 사람이라면 전 도지사 송하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당수는 그의 아버지 서예가 송성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송성용 명필의 스승이었던 간재 전우 선생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성은 간재 선생 알고 있지요. 전북 사람으로 간재 선생을 모르면 유식하다 할 수 없는데요.”
가끔씩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자극을 주는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휴우!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알고는 있었으니까.
전북 사람이라면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한다. 웬만한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 가운데 간재 선생을 모르고 있으면 낯 뜨거울 수도 있다. 그만큼 간재 선생의 존재는 묵중하다.
그는 전주 출신의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다. 전라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끼친 영향이 막중하다.
그 간재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제자였던 강암 송성용 명필의 기념관인 전주 강암서예관에서 “간재 선생 서거 100주년 기념 서예전”이 열렸다.
여기에는 간재 선생을 추모하는 국내의 학자와 서예가는 물론이고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 외국 작가들도 참여하였다.
작품은 간재 선생의 삶과 학문을 한시로 쓰기도 하고 간재 선생의 시구 중에서 뽑아 쓴 작품도 있다. 작품을 만든 작가 중에는 서예가 아닌 사람도 있다. 평소에 그의 학문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 것이다. 하나같이 품격 있는 글들과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한 최영성 간재학회 회장은 간재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그의 제자였던 강암 송성용 기념관인 ‘강암 서예관’에서 서예전을 갖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1841~1922)은 조선조의 마지막 성리학자다.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전주에서 공부를 하다가 열네 살 때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당시 유명한 유학자였던 임현회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전통 유학과 사상을 공부하고 이를 계승하려고 하였다. 그중에서도 이이와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로 국권을 잃게 되자 전북으로 내려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는 부안으로 내려가 여러 섬을 다니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계화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계화도 양지마을에서 3,000여 명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곳에는 지금도 1932년에 건립한 계양사가 있으며 이곳에 간재 선생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초상화는 조선 후기 화가 채용신이 1911년에 그린 초상화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후 전주에 와서 많은 유학자들을 길러내었다.
간재 선생은 주자학을 정확히 알고 있고 이를 널리 보급시킨 학자로 전국에 알려져 있다.
간재 선생은 성즉리(性卽理) 설을 주장하였는데 영남의 한주학파인 한주 이진상이 주장한 심즉리(心卽理) 설을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심성논쟁(心性論爭)으로 발전시킨 조선 성리학의 최후 논쟁을 이끈 사람이다.
간재 선생은 1922년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33년에 그의 제자들이 모여 계화면에 계양사를 지어 위패를 모셨다.
간재 선생의 글을 모은 간재집은 총 59권 30책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간재 문집은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간재 선생은 생전에 간재사고(艮齋私稿)라는 자서를 붙여 문집을 정리해 두었다. 그러나 일제는 문집을 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은 선생의 문집을 몰래 출간하였다. 이것을 진주본(晋州本, 1927)이라 한다.
이후 전주의 최병심(崔秉心)등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신도본(新都本)이라 한다. 또 1929년 중국 상해에서 발간한 추담별집(秋潭別集)이 있다.
1975년에는 화도본(華島本) 전우전집이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되었고, 1984년에는 보경문화사에서 간재 전집이 영인되었다. 이로써 간재 문집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간재 문집은 내용이 깊고 범위가 방대하여 사계 전문가의 국역이 절실한 형편이다.
간재 선생의 학문의 영향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충남 태안군에 있는 안양사에서도 간재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제향제가 열렸다. 태안군은 안양사봉양회를 조직하고 군의회 의장이 초헌관이 되어 해마다 중양일인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간재 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세 차례에 걸쳐 청참오적(請斬五賊) 상소문을 올려 을사 5적인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을 참수하라고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다.
100년 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와 부안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던 간재 전우 선생의 발자취는 지금도 전주향교의 정문인 만화루(萬化樓)를 비롯하여 곳곳에 남아 있어 선생의 숭고한 학문과 나라 사랑의 뜻을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