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타고 나타난 키 크고 코 큰 선교사가 지금의 전주역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가 자리를 옮겨 지금 호성동 소양천변 한사월 신중마을에 있다. "전주호성교회"가 그 교회다.
“성, 마로덕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호성교회가 그 교회랍니다. 꼭 찾아가 보슈.”
전화로 말하고는 친절하게 다시 핸드폰으로 자세히 자료를 보내준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집에서 거리를 재어보니 20리 길이 짱짱하다. 잘 됐다. 어차피 매일 1만 보 이상 걸어야 하니까 용진다리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에서부터 둑길을 걸어갔다가 돌아오면 1만 보 넉넉하겠다.
호성교회로 가는 둑길은 소양천을 따라 계속 걸어가는 힐링 코스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소양천에는 갈대와 억새가 어우러져 피어 있고 언제 왔는지 청둥오리가 떼를 지어 물 위를 헤엄쳐 다니고 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강변이다.
가을 햇살이 따뜻하게 비쳐주고 있는 강가의 산책로를 여유만만하게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천판욱 선생, 그가 고맙다.
우리 전라북도에 들어온 초창기 선교사들은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다. 그들이 호남지방 선교를 맡았다. 다른 지역보다 교세가 왕성했고 핍박을 많이 받은 지역이라 곳곳에 선교사들의 숨은 이야기들이 많다.
마로덕 선교사라 부르는 루터 올리버 맥커친(Luther Oliver McCutchen)은 미국 남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데이비슨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와 1903년 전주에 오게 되었다.
그는 주로 전북의 동남쪽을 선교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그는 동부 산악지역을 말을 타고 다녔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로덕(馬路德)이었다. 말을 타고 길을 돌아다닌 덕분에 많은 선교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라 했다.
그는 말을 타고 소양을 지나 높은 위봉고개를 넘어갔다. 그곳은 전국적으로 오지로 소문난 동상면이었다. 위봉폭포 부근에서 위봉 교회를 세운 그는 학동교회, 수만교회, 신월교회를 연이어 설립했다. 그때가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였다.
마로덕 선교사가 전주 초곡면 신기리에 호성교회를 설립한 것은 1912년이었다. 지금의 전주역 자리였고 “초곡교회”라 이름 붙였다.
그 후 1936년에 지금의 호성교회 자리인 완주군 초포면 송전리에 목조 초가 13평짜리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송전교회라 불렀다. 지금의 덕진구 호성신중길 6번지가 그곳이다.

그 후 신사참배를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1943년에는 교회당을 강제 철거당하고 몇 명의 교인만이 완주군 삼례면 수계리 모래거리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다.
해방이 되고 난후 1946년에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최대흥으로부터 목재와 기와를 헌물 받아 18평의 목조 교회당을 건립하였다.
195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교회이름을 전주호성교회로 개칭하였다.
1956년 교인의 확산으로 구 건물을 철거하고 45평의 교회당을 신축했다. 2013년 5월에는 100주년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호성교회 마당에는 “마로덕 박사 기념비(馬路德博士紀念碑)”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1936년 마로덕 선교사의 회갑을 기념해 세웠다 한다.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마로덕 선교사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마로덕 선교사인 O. L. McCulchun은 1873년 미국 캐롤라이나 비숍빌에서 출생하여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02년 남장로교의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귀국하여 조세핀과 결혼하고 부부가 전주로 돌아왔다. 1903년부터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던 1940년까지 38년 동안 완주 지역과 무주, 진안, 장수, 금산, 서산, 임실, 순창, 남원 지역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80여 개의 교회를 건립했다.
1910년에는 전북 남성경학원을 설립하여 교회 지도자를 양성했으며 달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회 교사들을 양성하였다.
1940년 신사참배를 거절한 죄목을 씌워 일제가 강제로 출국시키기까지 38년 동안 전북지역의 선교활동을 했다. 그 후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마로덕 선교사가 거처하던 집은 지금 엠마오 사랑병원 입구에 있는데 전주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양옥집이다. 엠마오 사랑병원은 예수병원 전신으로써 이 부근에 초창기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선교사들의 흔적들이 많이 있다.
선교사들의 사택이 몇 채가 더 있고 선교사 묘지도 있으며 최근에는 기독교 선교 기념관도 만들어져 있다.
마로덕 선교사의 양옥집은 현재 한국교회 사적지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생동하는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전주호성교회 마당에 서 있는 마로덕 선교사 기념비는 1936년 2월에 남성경학원생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되었으며 한국전쟁 때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당초 이 기념비는 예수교장로회 통합 전북노회 회관에 있었으나 2007년 노회회관이 매각이 됨으로써 이곳 호성교회로 옮겨왔다고 한다.
전주호성교회 마당에는 또 하나 기념물이 있다. “100주년을 기념하며”라는 타이틀과 함께 만들어진 작은 기념물인데 무쇠로 만든 종이 보관되어 있다.

종 아래에는 “이 종을 세우는 뜻”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이 종은 1963년 12월 20일 호성교회가 혼란의 아픔과 함께 없어졌던 이 전의 종을 다시 세우고자 전 교인이 성미 모으기 운동을 벌여 1965년 1월 10일 철재 종각 및 이 종을 봉헌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 2월에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종각은 폐쇄하고 이 종만 보존된 것입니다. 이에 교회가 2012년 12월 15일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이 종을 봉헌하기 위하여 어려운 가운데서도 많은 기도와 정성을 기울여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가꾸고 사랑하였는지를 기리어 후진들에게 전승하고자 이 종의 내력을 여기에 새겨둡니다.
2013년 4월
대한예수교 장로회전주호성교회 교우 일동
여기에 쓰여 있는 ‘혼란의 아픔’이란 일제강점기 때에 있었던 쇠붙이 공출 때나 한국전쟁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주 서문교회의 종도 일제강점기 때에 쇠붙이로 공출당해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로덕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며 오랫동안 생존했던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다. 살기 좋은 미국을 떠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가난과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이 많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고난을 자처하면서까지 청춘을 바쳤으며 목숨마저 바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주었으며 지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