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송천동 보훈공원으로 이전
“성님은 임실 사람인데 혹시 이석용 의병장과 관련된 추모 시설이 전주에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느닷없이 생뚱맞은 질문을 한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알고 있지. 전북대학교 뒤 조그마한 동산에 황극단이 세워져 있지.”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지금은 그곳에 없어요.”
“으잉? 그게 어디로 갔단 말이야?”
불티나게 찾아간 곳은 전에 어린이 회관이라 불렀던 '전라북도 어린이 창의체험관' 옆의 '보훈공원'이었다.
덕진공원 내의 연지 다리를 튼튼한 연화교로 개설하고 연화정 작은 도서관을 세운 전주시가 덕진 공원과 어린이 창의체험관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황극단을 이곳 보훈공원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하긴 전에는 길에서 보이지도 않았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한쪽에 있어서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옮겼으니 오히려 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잘 옮겨 놓았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잘 옮겨 놓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황극단은 일제강점기 때에 임실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아들 이원영 의사가 건립한 추모비다.
이석용 의병장은 일본이 강제로 한국 군대를 해산하자 진안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진안 용담, 정천, 임실, 순창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지역을 확산하여 남원과 정읍 태인에서도 전투를 벌였던 독립투사다.
1907년 11월에는 장수를 공격해 일본군이 남원으로 달아나게 했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수류산, 임실 관촌역, 운현 등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하였다.
1909년에는 의병단을 해산하고 잠시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으던 중 1912년에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1914년 4월에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3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그는 순국하기 전 아들인 원영에게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제단을 세워줄 것을 유언하였다.
이원용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행상을 하면서 모은 돈과 소유하고 있던 농토를 팔아 순국열사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황극단이다.
황극단은 원형의 단을 쌓고 한가운데 고종 황제 비를 세우고 둘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 비, 대한장의 순국 5열사(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이준, 백정기)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비, 이석용 의병장 비를 세웠다.
황극단에서는 매년 오월 단옷날에 추모제가 열린다.

전주 송천동 보훈 공원으로 이전한 황극단
황극단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55년 덕진 공원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친일 세력들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모를 당하였다. 후손들에 의해 재정비된 것이 2003년 전북대학교 뒷동산이었다. 최근에 송천동 보훈 공원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석용 의병장에 대한 유적은 임실군 성수면에 그의 생가가 있고 소충사가 있다. 소충사는 임실군 보훈시설로 이석용 의병장과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의병 28인을 배향하는 시설이다. 1957년 7월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로 “소충사(昭忠祠)”와 “조의단 28의사 추념문“ 글씨를 받아 비에 새겨 놓았다.
이석용 의병장은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대밭 뜸에서 전주 이 씨 4대 독자로 태어났다. 17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한 출중한 인물이었다. 일제가 을사늑약을 맺고 군대를 해산하자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성수산 상이암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1907년 진안 마이산 용바위에서 호남의병장의동맹단을 결성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에 모여든 의병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한다. 이 의병단은 진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파하고 임실, 남원, 정읍, 영광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매일 ‘격중일기’를 썼다. 그러나 한지에 기록한 이 일기는 바위 밑이나 땅을 파고 묻어 놓아 물기가 배어 극히 일부를 빼고는 식별이 어렵게 되어 복원이 어려웠다.
후에 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정재문집'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21일 마지막 전투인 임실 운현 전투가 있었다. 일본군이 진안을 가기 위해 운현을 지나간다는 정보에 의해 운현에 매복해 있었다. 밤이 되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의병들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은 화약이 비에 젖으면 쓸모가 없어진다. 일본군들이 가지고 있는 신식총은 비가 와도 격발이 가능한 총이었다.
“나라 위한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하늘이 돕지를 않는구나!”
의병들은 한탄하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얼마 후 성수산 불당골로 다시 모인 동지들은 몰래 운현골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고는 통곡을 하였다.
그 후 이석용 의병장은 은신을 하고 있다가 배반자에 의한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임실군에서는 이석용 의병장의 충‧효‧열 정신을 기리고 그의 뜻을 이어받기 위하여 소충사를 성역화하고 해마다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추모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배척하는 친일파들이 계속 집권하면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역사적으로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친일파들을 단죄하는 것은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지금 한창 공사 중인 보훈공원은 황극단을 비롯하여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이 함께 있으며 충혼각을 비롯한 보훈 시설을 갖추어 시민들의 나라 사랑의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