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 독립운동가
전주 전통문화연수원에는 동헌보다 더 근사하게 생긴 고택이 하나 있다. ‘ㄱ’ 자 모양인 이 한옥 고택은 그 정교함이 한옥으로써의 멋을 부릴 대로 다 부린 우아하고 이름다운 집이다.
이 건물은 어느 부잣집 안채였다. 그리고 그 옆에 중간 채라 부르는 한옥이 한 채 더 있다. 이 두 채의 고택이 바로 부자로서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일송(一松) 장현식(張鉉植) 선생의 집이다.
“성, 오늘은 일송 장현식 선생 유적지를 찾아갑시다.”
“한옥마을에서 장현식 선생 고택 보았잖아.”
“그것 가지고는 양이 안 차죠. 장현식 선생이 살았던 곳을 가봐야지요.”
그곳이 바로 김제 금구란다.
나의 길 아내자요 멘토요 앤돌핀인 그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일송(一松) 장현식(張鉉植) 선생은 인동(仁同) 장 씨로 시조 김용 공의 30대 손이요,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송은 안세 공의 19대손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말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의분에 받쳐 단식 절사하신 장태수 선생의 종증손이다.
장현식 선생은 당시에 만석꾼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얼마든지 부자로써의 부귀를 누리며 편히 살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태롭고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고 사회사업가와 정치가로써의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에 북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현식(張鉉植) 선생은 1896년 김제 금구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고종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장태수(1841~1910) 선생이었다. 증조할아버지인 장태수 선생은 장현식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
그렇던 장태수 선생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한탄하며 단식을 하여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기 위하여 서강사를 지어 그의 뜻을 새겼다.
이러한 장태수 선생의 영향을 받은 장현식 선생은 나라의 독립과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애국자요 민족지도자였다.
1919년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인 대동단이 창단되자 당시 23세였던 선생은 대담하게도 3천 원의 거금을 운영자금으로 제공하였고 대동신문 재정 운영을 맡아 일했다. 1921년에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김제 금구에 있는 장현식 선생 기적비
선생은 교육 사업에 뛰어들어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민족사학 재단법인인 중앙학원을 설립했고 고려대 설립 당시 본관 2층 8칸 교실을 지어 헌납했다. 동아일보 창간 때에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조선어사전 편집사업에도 관여하여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이극로 등과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수만 원을 지원하였으며 당대의 망명자나 예술인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 후 전라북도 2대 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에 납북되어 1950년 10월 24일 평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의 유해는 평양의 재북 인사 능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장현식 선생이 살던 김제시 금구면 서도마을의 한옥은 지금 전주한옥마을 전주 전통문화연수원에 이전되어 보존 중이다.

한옥마을로 이전한 장현식 선생의 안채와 중간채
이 건물은 장현식 선생의 후손인 장남 장흥 씨가 2007년에 안채와 중간 채를 전주시에 기증함으로써 한옥마을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장현식 선생 고택은 1930년대에 지은 집으로 당시의 한옥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민속자료이며 목재 가공의 기술이 정교한 전통 한옥이다.
부귀(富貴)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돈이 많은 것은 그 돈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사람마다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현식 선생이야말로 가진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쓰다가 간 사람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