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에 세워 둔 전주 유곽 입구
아직도 친일 잔재 유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것이 있고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기기에는 껄끄러운 것들도 있다.
그중에 하나가 전주 다가동 서문교회 뒷길에 있는 유곽거리의 돌기둥 2개다.
아무런 글자나 그림도 없이 골목길 양쪽 담에 딱 붙어 서 있는 돌기둥 2개인데 뭐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그러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돌기둥이 어떤 돌기둥이었는지 안다면 당장 뽑아버리고 싶은 물건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세워놓은 유곽 입구의 돌기둥
일본 사람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다.
한일합방을 이루어 놓고 멀쩡하던 전주성을 허물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의 혼이 담긴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돌들 중 2개를 가져다가 어느 골목길 입구에 세워놓았다. 유곽(遊廓)의 입구인 것이다.
전에는 성 밖에서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점차 성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만든 것이 유곽이다. 그것도 전라북도 최초의 교회가 서 있는 서문교회 바로 옆에다 만들었다.
유곽(遊廓)이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창녀들을 두고 매음 행위를 하는 집이나 그런 집들이 모여 있는 구역을 말하며 공창(公娼)이라고도 한다.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하는 업소는 사창이라 했으며 비슷한 말로는 윤락가, 또는 홍등가가 있다. 얼마 전까지 선미촌이라 이름 불렀다.

다가공원 맞은편 서문교회 뒷길에 있는 유곽거리
유곽(遊廓)은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5년 오사카에 처음 만들었으며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각지로 퍼져나갔다. 객지에서 혼자 생활을 하는 남자들을 위한 공창인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단순한 매춘지역이었으나 에도시대의 유곽은 음악, 문학, 미술, 연극 등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까지 갖추게 되어 일본의 귀족적 고전문화를 계승하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기생을 흉내 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침략과 함께 일본인 거류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 생긴 곳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 지역이었으며 서울, 인천, 원산 등지로 퍼져 나갔다.
전주는 일본인들이 전주성을 헐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을 위한 유곽을 서문교회 옆에 만들었다. 유곽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택하였으며 출입문이 하나로써 은밀히 드나들었다.
지금 다가공원 맞은편, 서문교회 뒷길의 전라감영 1길 좁은 골목 입구에 서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유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전에는 전주 미래유산의 표찰이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떼어져 없어지고 아무런 표식 없이 서 있다.
그것도 따로 서 있는 것도 아니고 담벼락에 딱 붙어 있어서 유심히 보지 않고는 눈에 띄지도 않는다. 저 돌기둥을 통과하여 들어간 일본인들이 얼마나 거드름을 피웠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역겹다. 그들이 상대하던 여자들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유곽은 1916년 10월까지 이곳에서 운영되다가 이후 진북동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출입구의 돌기둥은 그대로 서 있다.
이들 공창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더욱 확대되어 만주를 비롯한 중국과 동남아까지 확대되어 군 위안부가 되었다. 순진한 어린 소녀들을 취직시켜 준다고 속여 군 위안부로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사과 한 마디 없이 발뺌을 하고 있다.
한국의 유곽은 1947년 10월, 미 군정청이 공포한 ‘공창 폐지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좁은 골목에 서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100년이 넘는 세월 저쪽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던 숨겨진 이야기들을 안고 존재감 없이 서 있는 것이다.
하기야 저 돌덩어리가 무슨 죄가 있으랴. 그냥 돌덩어리라 생각하면 마음 편할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