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인 웅치(熊峙) 전적지(戰迹地)가 국가문화사적지로 승격되었다.
웅치 전적지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 걸쳐 있는 사적지로써 임진왜란 당시 전주를 공략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막은 중요한 전적지다.
비록 이곳에서 싸우던 우리 군이 많은 희생자를 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하였으나 이곳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왜군은 제대로 전주를 공격하지 못하고 전주 공략에 실패하게 되었다.
조선에 상륙한 지 40여 일만에 한양과 개성을 거쳐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발을 디디지 못했던 호남을 공격하기 위해 왜장 고바야가와의 별장이었던 야스쿠니지는 창령에 있다가 남원을 거쳐 전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병장 곽재우 장군에 의해 진로가 막히자 성주로 이동하였다. 이 부대가 용담과 진안을 공격하고 웅치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게 되었다.

전주를 지켜온 웅치 싸움의 전적지
1592년 7월 7일
우리 조선에서는 웅치를 방어선으로 전주를 지키려 하였다. 웅치 싸움에서 김제군수 정담과 동복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이 연합하여 수천 명의 왜구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8일, 왜군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중과부적이었다. 조총 앞에 화살이 떨어지고 동지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이 싸움에서 정담과 강운, 박형길이 전사하고 나주현감 변응정이 중상을 입었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에 감복하여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어 주고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주었다.
웅치싸움에서 크게 손실을 입은 왜군은 웅치를 넘어 전주를 향해 진군을 했다. 7월 9일 마침내 왜군은 전주와 가까운 안덕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웅치 싸움에서 잠시 물러났던 황진과 이정란 장군의 공격을 받아 전주 공격을 포기하고 진안으로 물러났다.
한 편 남원에서 만인의 성을 공격하였던 왜군은 남원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군을 하고 있었다. 전주로 가는 길목인 남관과 좁은목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 왜군은 길을 돌아 왜망실로 들어왔다가 미리 잠복해 있던 조선군에 의해 패하여 전주성 공격은 실패로 끝남으로써 전주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전주가 온전하게 지켜지게 된 또 하나의 싸움으로는 이치 전투를 들 수 있다.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황박 의병장 추모비
이치는 완주군 대둔산 기슭으로써 운주와 진산 사이의 고개를 말한다.
왜군은 2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 이 고개를 넘어 전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때에 광주 목사 권율, 동북현감 황진, 의병장 황박 등이 관군 일천 오백여 명과 의병들을 지휘하여 왜군을 물리쳐 전주를 지켜낸 것이다.
이곳에서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호남의 중심지였던 전주를 지킬 수 있었고 호남을 지킴으로써 군량미 조달이 원활하여 왜군을 몰아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웅치전적지는 전라북도와 완주군, 진안군이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758,039제곱미터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162,087제곱미터의 땅의 웅치 전적지를 국가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장과 문화재청 사적분과 위원회원들이 현장을 찾아 조사를 했으나 지정을 보류했다.
지정이 보류된 이유는 범위가 너무 넓어 토지 매입에 어려움이 있고 웅치 전투 지역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범위를 조정하여 231,556제곱미터로 축소하여 재심을 요구한 결과 이를 받아들여 국가 사적지로 지정을 받은 것이었다.
웅치전적지 국가사적지 신청은 2016년 전라북도의회 박재완 완주 도의원이 처음 발의를 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지방 사적지에서 국가사적지로 승격을 했으니 다시 한 번 웅치전적지를 돌아보면서 그날의 치열했던 싸움을 상기해 볼 만하다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