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객사의 현액 중 가장 큰 글씨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생지다.
왕이 전권을 쥐고 나라를 다스리던 조선 초기에 전주는 굉장한 곳이었다.
그러나 왕이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파당들이 권력을 쥐기 시작하면서 전주의 빛도 흐려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닙니다. 선비의 나라입니다.”
어느 연속극에선가 신하가 왕에게 이르는 말이다.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쥐락펴락하기 시작하면서 전라도 출신들이 위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철에 의해 자행된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 출신들의 정계 진출의 길이 막혔다.
실제로 정여립 사건 이전에는 과거 급제자 수가 많은 곳이 서울 다음으로 전주였다. 그러나 정여립 사건 이후에는 맨 뒤로 추락하고 만다. 동인들의 멸망으로 한동안 서인들의 세력은 대를 이어간다.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를 대표하는 곳이 어디일까?
경기전과 조경단, 그리고 객사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보물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는 객사는 전라감사가 부임하면 임금님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곳이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객사에 와서 또 절을 올리던 곳이었다.
객사를 바라보면 건물 중앙에 크게 써진 현액의 글씨를 볼 수 있다.
“풍패지관(豐沛之錧)”
글씨가 클 뿐 아니라 휘갈겨 쓴 글씨체가 위엄하면서도 날아오를 듯한 위용까지 갖추었다.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성님, 저 풍패지관을 누가 썼을까요?”
“글쎄, 저 정도로 글씨를 쓰려면 한석봉이나 김정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둘 중 한 사람 아닌가?”
“아닌 데요.”
도리질을 하면서 뜸을 들이는 그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전주 객사는 중앙에서 전주에 온 고급관리나 외국에서 온 사신이 머물던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호텔이다. 전라감사가 부임하면 서울 임금님을 향하여 예를 올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축하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주관(主館)이 있고 양쪽으로 숙소인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관의 처마 아래에 풍패지관(豐沛之錧)이라고 쓴 거대한 편액이 걸려 있다. 전주 객사에 어울리는 위용을 갖춘 글씨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중국 송나라 시대 3대 문장가로 알려진 주지번(朱之蕃)이다.
그가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는 명나라 때에 중국에 사신으로 온 조선의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스승을 만나기 위하여 온 것이다.
내로라는 중국의 문장가인 주지번이 어떻게 조선의 송영구를 스승이라 부를 수 있었는가?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전주 객사의 편액을 쓸 수가 있었을까?
거기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 만큼이나 기묘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송영구는 정철과 함께 기록관인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다. 북경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때에 허드렛일을 해주던 한 청년이 글을 읽는 소리가 하도 낭랑하여 그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책과 돈까지 주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 청년은 송영구의 가르침과 격려에 힘입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고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 청년이 바로 주지번이었던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도착하자 스승인 송영구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되었는데 고향인 익산을 향하여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주 객사에 머무르면서 풍패지관(豐沛之錧)이라는 편액을 남기게 되었다.
주지번은 성균관의 '명륜당(明倫堂)' 편액을 썼으며 경포대의 '제일강산(第一江山)'도 써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풍패지관(豐沛之錧)이라는 말 중 풍패(豐沛)는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패현(沛懸) 풍읍(豊邑)을 의미한다. 나라를 세운 사람의 고향을 의미한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를 말하는 것이다.
전주부성의 중심에 서 있던 전주객사의 현액 풍패지관은 조선 왕조의 국권을 상징하기도 한 중요한 곳이었다.
최근에는 풍패지관의 객사 주변에서 고려시대의 기와와 상감청자편, 일휘문 수막새, 건물벽제편, 전돌 등의 유물이 나와 전주 객사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주 객사는 일제강점기 때에 북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길을 내면서 동익헌 건물이 헐리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전북대학교 전신인 명륜대학의 강의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팔달로와 충경로가 만나는 사거리 주변의 전주 객사와 풍패지관의 편액은 오다가다 만나는 건물이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중요한 자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