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궁궐터 지금의 어디인가

물왕멀 부근이라고 알려진 궁궐터

작성일 : 2023-02-08 16:33 수정일 : 2023-02-09 08:28 작성자 : 이용만 기자

 

 

 

후백제는 참으로 어이없이 종말을 고한 안타까운 나라였다.

건국 37년 만에 망해버린 단명의 나라가 왜 그렇게 안타까울까?

 

견훤(甄萱)이 읊었던 시에 그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평양의 대동강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 물을 먹이리라.”

그것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만 것이다. 

 

한때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신라 수도까지 군사를 몰고 들어가 왕을 죽이고 다른 왕을 세워놓기도 하였다.

그렇던 후백제가 아직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도 전에 후계 문제로 왕이 절 안에 갇히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정권이란 세상의 어느 것보다 탐욕스러운 것이라 진리도, 의리도, 충효도,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왕권을 거머쥐기 위해서는 부모도 죽이고 형제도 죽인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왕이 되면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견훤은 그것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첫째 아들 신검의 힘과 넷째 아들 금강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을 때는 아직 견훤의 힘이 팔팔할 때여서 후계자 문제는 거론할 필요가 없었을 때였다. 섣불리 후계자 말을 꺼내어 화를 자초한 것이다.

후계자를 금강으로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첫째 아들 신검은 경상도 진주도독으로 있는 둘째 양검과 광주도독으로 있는 셋째 용검에게 군사를 몰고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자기가 왕으로 등극을 하여버렸다. 그래서 후백제 2대 왕이 되었다.

 

전투에서 가장 어이없이 지는 경우는 분란이 났을 때다. 군사의 수가 부족하다든가 전술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패했다가도 다시 회복을 한다. 그러나 분란이 났을 경우에는 한쪽이 적에게 붙기 때문에 회복이 어렵다.

견훤은 금산사를 빠져나가 적인 왕건에게 갔다.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후백제를 공격했다. 자기 나라 왕이었던 사람이 자기들을 죽이러 적의 군사를 끌고 오는 상황에서 후백제 군사들이 얼마나 당황했겠는가는 짐작이 간다. 그로부터 후백제는 멸망의 길로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견훤의 묘는 전주 부근에 있지 않고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허술하게 놓여 있다.  

 

 왕릉으로서는 허술하게 놓여 있는 견훤의 무덤

 

후백제가 똘똘 뭉쳐 종사를 이어갔더라면 전주는 지금의 전주가 아니었을 것이다. 경주에 버금가는 왕도로써의 위용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견훤은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의 장군이었다. 이름이 아자개(阿慈介)다. 그러면 견훤도 아(阿) 씨여야 맞다. 어떤 이는 조상이 백제 사람으로 성은 이 씨이며 부여융의 9대손이며 의자왕의 10대손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견훤은 성을 견(甄)씨로 바꾸고 본을 전주로 삼았다. 전주 견 씨(全州甄氏)의 시조인 것이다.

 

후백제의 도읍지였던 전주에서 궁궐터는 어디였을까?

물왕멀 부근이라고만 알려진 궁궐터는 현재 인봉리 부근이다.  시내에서 아중리로 가는 마당재 길목, 전주제일고등학교로 진입하는 삼거리에 견훤궁터에 대한 안내판과 지도가 세워져 있다. 그 지도에 의하면 견훤의 궁궐터는 지금의 인봉리가 중심이 된다.

대략 전주고등학교 동쪽, 풍남초등학교 북쪽, 정보문화산업진흥원에서 전주제일고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기린봉 아파트까지 갔다가 거기에서 해오름 아파트 쪽으로 와서 기자촌 높은 지역인 삼마교회까지 갔다가 다시 인보성체 수도원을 지나 한국불교태고종 전북종무원으로 내려오는 지역이다. 지금 주택 재개발을 위해 터를 닦고 있는 기자촌이라 불리는 곳이 포함된다. 대단위 아파트를 지으려면 지하 주차장을 만들어야 하니까 깊이 파다보면 무언가 후백제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도 기대되는데 건설업자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부문이라 제대로 처리가 될지가 의문이다.

 

 

후백제 궁궐터로 추정되는 구역 

 

인봉리 동네로 들어가다 보면 어느 골목에 후백제 견훤 궁터에 대한 발굴 흔적이 나온다. 궁터를 입증할만한 발굴 터다. 몇 가지의 유품과 자료가 나온 곳이다.

 

견훤의 궁궐터는 동고산성과 관련이 있다. 견훤이 궁궐을 세우면서 유사시에 대비할 동고산성 안에 또 다른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다.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는 동고산성 내의 궁궐터는 규모가 아주 크다. 그가 좀 더 오래 정권을 유지했더라면 웅장한 궁궐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 서서 흘러가고 패자는 말이 없으니 견훤의 궁궐터나 동고산성의 궁궐터 역시 패자의 희미한 흔적만 가물가물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정확하고 빠른 전라북도 소식으로 지역공동체의 건강한 내일을 위한 건강한 정보를 전달드리겠습니다."
저작권ⓒ '건강한 인터넷 신문' 헬스케어뉴스(http://www.hcnews.or.kr)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후백제 #궁궐터 #물왕멀 #전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