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청웅을 가기 위하여 임실에서 출발하여 모래재를 넘으면 하얗게 빛나는 산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곳이 청웅임을 알리는 백련산이다.
청웅면은 임실군 12개 읍 면의 하나로 임실읍, 신평면과 더불어 다른 시군과 접경을 이루지 않은 임실군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특별히 청웅이 주목을 받는 것은 삼한 시대부터 임실지역의 행정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그 후 임실읍 지역으로 행정 중심이 옮겨 가기는 했지만 오랜동안 임실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적인 요새 같아서 적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물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청웅에는 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는 곳이 많습니다. 생각보다는 소중한 유적지를 보여드리지요.”
시시때때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그가 차를 몰아 좁은 골목을 빙빙 돌더니 한 곳에서 멈춘다. 거기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작은 안내석들이 서 있다.
그 중 하나가 “옥밖거리 마을”에 대한 안내석이다.
부족국가가 발달하여 가던 삼한 시대에 마한의 54개 부족 국가 중 중대석 석국의 구고현으로 임실의 서남과 서북을 관장했던 소재지로써 현청이 원동에 있어 현령이 거주하면서 행정을 펼친 곳이다. 백제의 들평현 때에 현령이 거주했다는 사실과 구고리 앞산에 성재와 지금의 청웅 파출소 사이에 죄인들을 가두어 두고 교화시켰던 감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의 구고리 안내석이 있는 부근이 감옥 밖에 있던 마을이라 해서 "옥밖거리 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삼한 시대 마한의 구고현의 감옥이 있던 바깥 마을의 터, 옥밖거리 마을
또 하나 안내석에는 김영현 선생이 세운 삼화학교인 “사마제 학교” 터가 있다. 청웅면 선거리 시목동의 김영원은 운암면 지천리 최승우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다가 공주 전투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회문산에서 6년간 피신해 있었다. 그 후 회문산에서 나와 1906년에 이곳에 삼화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쳤다. 학교를 세울 때에 자금은 최승우가 제공하고 김영원이 교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학교 건립 추진위원으로는 최승우, 김영원, 박준승, 박성근, 황희영, 한영태 등이었다. 이들이 삼화학교에서 민족 정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감시하던 일제는 이곳이 배일사상의 온상이라 간주하고 1909년에 강제 폐쇄하였다.
그 후 이곳은 천도교 347 교리 강습소로 개칭하여 활용하였으며 청웅면사무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 한 곳에는 임실군 천도교구에 대한 안내석이 있다.

임실군 천도교구가 있던 옛터
이곳은 1908년 3월에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의 임실군 천도교 제1교구의 교구장 최승우와 청웅면 향교리 성전마을의 제2교구장 박준승이 힘을 합하여 청웅면 양자마을의 삼화학교 주변인 이곳에 통합 임실군 천도교구를 설치하였다. 제1대 교구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이며 삼화학교 건립자인 최승우였으며 제2대 교구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요 독립운동가인 김영원이었다. 3대 교구장은 허성이었으며 4대 교구장은 김영원이 다시 맡았다.
그 후 행정 중심이 임실로 옮겨가면서 천도교구도 임실면 성가리로 이전하여 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청웅 기미 3‧1 독립운동 기념비”가 서 있는 “기미 만세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기념탑은 물론이고 1919년 만세운동에 대한 대형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공연무대도 있다.
“청웅 기미 3‧1 독립운동 기념비”에는 “기미 3‧1 독립 운동 약사”와 당시에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기미 3‧1 독립 운동 약사”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청웅면은 마한으로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군현의 중심지였고 외침의 국난기마다 많은 열사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경술국치로 국권 상실의 비운 속에 기미년 3월, 온 겨레가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대운동이 전개되자 당시 구고면 선거리 감나무골에 삼요정을 짓고 기미 독립만세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박준승과 양한묵 애국지사를 양성한 김영원 선생이 이곳 구고리 양지마을에 삼화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의 선봉에 서자 그의 제자들이 임실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웅면민들도 떨쳐 일어났으니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19년 3월 2일
삼화학교 출신인 박성근 지사가 임실천도교 교구에서 받은 독립선언서를 장남 원엽 씨가 면사무소 게시판에 붙여 불길을 올리다.
- 3월 11일
100여 명의 군중이 구고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름
- 3월 15일
현재의 삼일 만세 공원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 수백 군중이 모여 본부를 설치하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면내 각 마을을 순회하며 독립만세를 부름
- 3월 16일 ~ 17일
남산리 – 옥전리를 왕래하며 야간 횃불 군중 시위를 계속함
- 3월 21일
주민 대표 15명이 임실경찰서에 구속된 독립투사 석방을 요구하며 감방 농성을 함
- 1925년 봄
청웅면 농악단의 풍물놀이를 강제 해산시킨 왜경 사또를 결박하여 모래재에 끌고 가 생매장을 위협하는 등 저항 운동이 광복 그날까지 끈질기게 계속됨
다른 면에서는 만세 한 번 못 부른 곳이 많은데 이곳 청웅면에서는 몇 차례의 만세 운동과 투쟁이 계속하여 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선각자 김영원 선생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자리에 설치된 만세운동 장면
기미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그들은 김영원, 박준창, 이강세, 박용식, 박정근, 한도수, 한기수, 최종수, 이성의, 이기섭, 정필조, 양성도 등의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홍봉성이 지은 시구가 새겨져 있다.
기미년 타는 횃불 두만뫼 달도 웃고
외치는 만세 소리 효례천 춤을 춘다
장하다 농군님네들 용사로다 그 의기
간악한 왜놈 발굽 내 고장 짓밟을 때
흙 묻은 검은 손에 태극기 높이 들며
끝까지 싸웠던 혼불 꺼질 손가 천만년
청웅은 지금은 사방이 고개로 둘러싸인 벽지가 되었지만 그런 지형을 이용한 방어 지역이었던 옛날에는 임실군의 행정의 중심지요 삼일 만세운동의 중심지였고 천도교 교구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