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의 가슴을 적시던 전설의 서예가
鳶飛魚躍
이 글자를 아시나요?
연비어약(鳶飛魚躍)인데 솔개 연(鳶), 날아오를 비(飛), 물고기 어(魚), 뛰어오를 약(躍) 자다.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에서 뛰어오른다는 말이다.
이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천지 만물은 타고난 본성에 따른다는 말이다. 옛사람들은 시경을 통하여 찬미하기를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나 물고기까지도 각각 제 자리에서 본성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가운데 발랄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주의 북쪽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건지산 체련공원에 전설적인 서예가였던 창암 이삼만 명필의 서예비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서예비에 쓰여 있는 글자가 바로 연비어약(鳶飛魚躍)이다.
그 옆에 연비어약(鳶飛魚躍)에 대한 해설을 해놓은 작은 비가 하나 있는데 여송 김계천이 뜻을 풀이하여 써놓았다.
이 서예비는 2002년 11월 29일에 사단법인 창암 이삼만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권갑석과 장인석재 사장 김종원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건지산 체련공원에 서 있는 창암 이삼만 서예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드나들었던 건지산 체련공원이고 도로변에 서 있는데도 이 서예비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덕진연못에서 소리문화전당 쪽으로 가다 보면 실내 배드민턴장이 나온다. 조경단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그 실내 배드민턴장 바로 옆에 있다. 그 주변에는 전북의 연극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박동화 흉상이 있고, 전북을 지키기 위하여 자원하여 군대를 창설했던 제3연대 창설 기념비가 있다.
명필 이삼만은 오로지 서예를 위하여 살아온 사람이다. 당시에 추사 김정희가 금수저였다면 창암 이삼만은 흙수저였다. 그는 말년에 지금은 편백숲으로 이름이 나 있는 완주군 상관면 공기마을에서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나무꾼이 되어 살았다.
창암 이삼만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서민들의 벗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애환을 함께 겪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전주시 교동 산동네인 발리산 자락 아래 자만동과 이어져 있는 옥류동이었다. 그곳은 한벽루 바로 윗동네다.
그곳에서 살면서 당대에 명필이었던 원교 이광사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그는 하루에 1,000 자씩의 글씨를 썼다. 병이 들어 몸을 움직이기 어려울 때에도 하루 천 자씩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벼루 세 개를 구멍을 내리라.”
그가 결심한 것 중 하나다. 먹이야 닳게 되어 있으니까 닳아 없앨 수 있지만 벼루는 돌이다. 단단한 돌을 연한 먹을 갈아 구멍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삼만은 벼루 세 개를 구멍을 내리라는 각오로 글씨를 썼다. 이를 마천삼연(磨穿三硏)이라 한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한 획을 가르치는데 한 달씩 걸렸다.
이삼만과 뱀의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옥류동에서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산에 갔다가 뱀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다. 뱀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뱀을 보기만 하면 잡아 죽였다. 그래서 뱀들도 이삼만을 무서워했다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 뱀은 물체를 거꾸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뱀 사(蛇) 자를 써서 거꾸로 붙여놓으면 뱀들이 얼씬 못한다는 것이다.
이삼만이 말년에 살던 곳은 완주군 상관면 편백나무 숲이 있는 고덕산 골짜기였다.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동네가 밥공기처럼 생겼다 하여 공기마을이라 불렀다. 동네 뒤에 “창암 이삼만 선생 고택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거기에서 가난한 나무꾼으로 살다가 갔다.
창암 이삼만은 조선 말기 명필가로 추사 김정희와 평안도 눌인 조광진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명필가였다.
그는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가 중국에 알려진 것은 대구 약령시에서였다. 당시 전주 약령시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곳이 대구 약령시였다.
창암이 살던 근처에 한약방인 약포 주인이 대구 약령시로 한약재를 사러 가면서 약재 품명을 좀 적어달라고 했다. 창암은 화선지에다 약명과 약재 명을 적어주었다. 마침 대구의 약재상이 중국인이었다. 약재 품명이 적힌 화선지를 받아 든 중국 상인이 깜짝 놀라며 누구의 글씨냐고 물었다. 이삼만이라는 사람이라고 말하자 약재를 주면서 약값 대신 그 종이를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중국에 가서 조선 명필 이삼만을 알렸다.
창암의 글씨가 중국에 알려진 이야기는 또 하나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한벽루에 와보니 부채 장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팔리지 않은 백선(그림 없는 부채)이 쌓여 있었다. 그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휘둘러 글씨를 써놓았다. 부채 장사가 부채 버려놓았다고 화를 냈는데 남문시장에 가서 팔아보라고 했더니 부채의 글씨를 알아본 중국 상인이 부채를 몽땅 사가지고 중국에 가서 창암의 글씨를 알렸다고 한다.
그와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창암 이삼만의 소문을 듣고 전주에 들려 창암을 만났다. 김정희는 이삼만을 탐탁지 않게 보았다. 금수저였던 그는 먹물을 듬뿍 묻혀 글씨를 썼는데 흙수저였던 이삼만은 먹물을 아끼기 위하여 조금 묻혀 갈필로 쓰는 글씨였기에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다.
“노인장께서는 이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고살겠습니다.”
창암의 제자들이 발끈했으나 창암은 제자들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이 글씨는 알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종이의 스미는 멋은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김정희의 머릿속에 이삼만의 글씨가 자꾸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혹평을 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기도 궁핍해지고 처량해졌다. 그 영향으로 생겨난 명작이 김정희의 “세한도”였다. 세한도에는 먹물을 뜸뿍 묻히지 않고 조금 묻혀 쓰고 그리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는 이삼만의 글씨를 본 후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삼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김정희는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삼만을 만나러 왔다. 그러나 이미 이삼만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젖은 김정희는 묘지의 글씨를 써주고 떠났다.
“명필 창암 완산이공 삼만지묘(名筆 蒼巖 完山李公 三晩之墓)
그리고 이런 글도 남기고 갔다.
“여기 한 생을 글씨를 위해 살다가 간 어질고 위대한 서가가 누워 있으니 후생들은 감히 이 무덤을 훼손하지 말지어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창암 이삼만의 묘
지금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에 있는 창암의 묘지 앞에 서 있는 묘비의 글씨가 추사가 써주고 간 글씨 진본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완주군에는 추사의 글씨가 몇 개 남아 있다고 한다. 전면에는 추사의 글씨가 쓰여 있고 후면에는 창암의 글씨가 쓰여 있는 비석도 있다고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했는데 전주에서 나서 전주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창암 이삼만은 글씨만 남기고 간 게 아니고 서민들 사이에서 살면서 숱한 이야기를 남기고 갔다.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