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관찰사를 두 번이나 한 사람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감사해야 할 전라감사는 누구일까?
조선시대의 관찰사와 감사는 같은 자리의 다른 이름이다.
전라도 사람으로서 감사해야 할 관찰사는 이서구다. 그는 40대와 60대에 전라도관찰사를 두 번이나 했다. 그러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문신이요 학자였던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풍수지리, 역학, 천문학에도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라감사를 수행하면서 풍수적으로 약한 부분을 보완하였으며 갖가지 예언들을 하기도 하였다.
이서구의 치적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덕진 연못조성이다. 지금의 덕진 연못은 전주가 북쪽이 허하여 북쪽 방비가 허술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만든 연못이다. 그 이유는 전주의 주산이라 부르는 건지산과 가련산의 산줄기가 가련하리만큼 가냘프게 이어져 감으로써 확실한 북쪽 방비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풍수지리에 밝았던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북쪽을 보완한 것이다.
또 남원 광한루에 있는 해태상은 이서구가 남원에 불이 자주 나는 것은 견두산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니 해태상을 세워서 견제를 하라고 해서 세워졌다 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삼거리에 세웠는데 후에 광한루로옮겨갔다.
봉동을 둘러보고는 이곳은 앞으로 만인을 구제할 약초가 자랄 것이라 했는데 지금 건강식품인 생강 재배지가 되었다.
동상 수만리에 가서는 이곳은 앞으로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 하여 수만리라 하였는데 일제 때에 동상저수지가 생겼다.
한벽루를 둘러보고는 장차 화마(火馬)가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철로가 깔리고 기차가 다니게 되었다.
새만금에 대해서도 예언한 것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고 ‘이곳은 앞으로 수저(水底) 30장이요, 지고(地高) 30장이 될 것이라 했는데 새만금 사업이 한창이다.

전라도관찰사가 근무했던 전라감영
전라도에는 그의 공적과 치적을 기록한 선정비와 불망비가 26기나 남아있다. 이는 가장 많은 공적비인 것이다. 그의 공적비는 전라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평양감사를 지낼 때에 세운 공적비가 평양에도 있고 경상도에도 있다. 그러나 전라도에 특별히 많은 것은 두 번에 걸친 전라관찰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이서구는 자는 낙서(落瑞)요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소완정(素琓亭), 석모산인(席帽山人) 등의 여러 호를 가진 사람으로 영조 30년인 1754년에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이원과 어머니 정경부인 평산 신 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라도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전라도관찰사 이서구
이서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10년을 기약하고 공부를 하러 보냈는데 9년 만에 돌아왔다. 이유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과거를 보아 합격을 하면 그 말이 맞고 낙방을 하면 그 말이 틀린 말이라 하였다. 이서구는 과거를 보아 급제를 했다.
그때가 21살 때였다. 이서구는 섭기주(攝記注)를 첫 벼슬로 전라도관찰사를 비롯하여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실학자들인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류를 하면서 실학에 대한 학문에도 관여를 하였다.
이러한 교우관계를 통하여 조선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사물을 관조하는 높은 정신세계를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척재집 16권과 강산초집 4권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40대 초반과 60대 후반에 두 번의 전라관찰사를 지냈다. 그러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그에 못지않게 숱한 이야기와 예언을 남겼다.
이러한 것은 그가 풍수지리에 밝았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그중에 하나는 고창 선운사의 보물 제1200호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불에 대한 이야기다. 마애불은 높이가 15.7m나 되고 무릎 폭이 8.5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다. 불상을 만들 때에 가슴에 금은보화와 귀한 책들을 넣는데 이를 복장이라 한다. 고창 선운사 마애불 복장에는 신비한 책이 들어 있는데 그 책이 밖으로 나와 알려지면 조선이 망한다 하였다. 그리고 책에 손을 댄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 하였다.
호기심 많은 전라도관찰사 이서구가 비기의 책을 한 권 꺼냈는데 첫 장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문을 열었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에 놀라 얼른 책을 도로 집어넣고 봉인을 했다고 한다. 후에 그 책을 동학농민군 지도자 손화중이 꺼내어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하농민군의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이서구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도처에 많이 있다. 이는 전라관찰사로서 선정을 베풀었고 역학과 풍수지리, 천문학 등 아는 것이 많아 많은 이야기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전라도 사람들이 가장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관찰사는 이서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