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냇물이나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어디에나 물길을 멈추게 하고 물을 가두어 두는 보나 댐이 있다. 이 보나 댐의 시초는 어살이다.
어살이란 내나 강을 가로질러 돌을 쌓고 돌 틈을 나뭇가지로 막아서 물을 가두어 두고 물이 줄어든 그 아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로 방법이다.
“형님, 어살이라는 말 들어보셨소?”
“그게 뭔데? 금시초문이구만”
“물고기 잡는 방법인데요. 도깨비 어살이 있답니다.”
“도깨비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고요. 도깨비가 만든 어살이랍니다.”
취재거리 제공자인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전화제보다.
어살의 흔적은 곳곳에 있다. 가까운 옥정호 아래에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곳은 전남 곡성의 ‘도깨비어살’이다. 줄여서 ‘도깨비살’이라고 부른다.
곡성의 도깨비살에는 마천목 장군이 있어야 한다. 마천목 장군 때문에 생긴 어살이기 때문이다.
옛날 고려 말, 충정공 마천목 장군이 어렸을 때에 부모님께 물고기를 드리려고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고기 잡는 어살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의 폭이 워낙 넓고 물살이 세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어살 작업을 하던 마천목의 눈에 푸른빛이 나는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하고 귀한 돌이어서 마천목은 그 돌을 건져내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수많은 도깨비들이 몰려와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대장님을 돌려주십시오. 그 파란 돌이 우리 대장님입니다.”
마천목은 아깝기는 하지만 푸른 돌을 내어주었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그 보답으로 어살을 막아준다 하였다. 그리고는 장차 부원군 대장이 될 것이라 하였다. 당시 가난한 서생이었던 그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도깨비들은 밤새껏 일을 하면 배가 고프니 100명이 먹을 수 있는 메밀죽을 쑤어 달라 하였다. 그런데 마천목의 집에 있는 메밀로는 99명 분 밖에 죽을 쑬 수 없었다.
보가 완성이 되었는데 메밀죽을 먹지 못한 도깨비가 보의 한쪽을 터놓고 달아나서 완전한 보가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도깨비들이 쌓았다는 섬진강의 어살 흔적
그때 도깨비들이 쌓았던 어살 흔적이 지금도 섬진강 호곡나루 아래쪽을 흘러가는 곳에 남아 있다. 이 어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어살이다. 이 보를 독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살뿌리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길이 곡성에 있다. 곡성 기차마을인 오곡면 오지리에서 압록까지 40리 길은 오색길이라고 부른다. 철길, 국도, 꽃길, 자전거길, 물길의 다섯 개의 길이 나란히 달려가는 길이다.
레일바이크 시발점인 침곡역과 송정마을 길을 따라가는 17번 국도변 고달면 두계마을 섬진강 가에 는 1999년 곡성문화원에서 세운 마천목과 도깨비살 표지석이 있다.
마천목 장군은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장흥 회령에서 태어났다. 15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당산촌으로 이사를 하였다.
본관은 장흥이요, 시호는 충정(忠靖)이었다. 조부는 종부령 마치원, 부친은 마사봉상시랑인 마영, 어머니는 평산 신 씨였다. 처는 목사 이빈의 딸 경주 이 씨였다. 장남이 이조참판 충간공 마승이었다.
마천목은 신체가 건장해 무예가 뛰어나고 머리도 명석해 모든 경서에 능통하였다.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 23살의 나이로 산원이라는 정 8품 무반직을 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조선 개국 시에는 대장군에 이르렀다.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에 정안군 이방원을 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선봉이 되어 박포를 잡아 난을 평정하여 익재좌명공신 3등에 봉하여졌고 회령군에 책봉되었으며 동지총제로 승지 되었다.
그 후 사람을 문초하다 치사한 과실로 고향인 곡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도절제사에 복직하였다.
전라도 병마도절제사 나주목사로 파견되었으며 1414년에 장흥군에 봉하여졌다. 1417년에 병마도절제사 마천목이 축조한 강진의 전라병영성은 전라도의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지금 대한민국 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천목 장군이 쌓은 전라병영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러 성보론을 상소하여 북방 6진 설치를 주장하였다. 후에 장흥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조선 초기 명나라에 가서 조선조 승인을 받는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축하연을 받기도 하였다.
마천목이 관직에서 무인으로 활동할 때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 나주 출신 정지(鄭地)였다. 정지는 고려 말에 전라도에서 왜구를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마천목이 군인으로 발탁이 되고 무관으로 진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마천목 장군을 기리는 재실
효성이 지극한 마천목은 곡성현 오곡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였다.
그는 장흥부원군으로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그는 곡성군 석곡면 통명산에 묻혀 있으며 화산서원 충현사에 배향되었다. 마천목의 묘와 재실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