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의 철산부사였던 진안의 전동흘 장군

진안 신기리 전동흘 장군 무덤과 사당

작성일 : 2023-04-13 19:07 수정일 : 2023-04-14 08:57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장화홍련전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의 원귀가 철산부사에게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철산부사는 귀신의 나타남에 놀라 졸도를 하고 죽음에 이른다. 새로 부사가 발령을 받아 오는데 그도 역시 첫날밤에 죽고 만다. 계속하여 부사가 죽어나가자 아무도 철산부사로 가려하지 않는다.

 

그때에 나선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졸도하지도, 죽지도 않고 장화와 홍련의 원한을 풀어준다.

장화홍련전의  철산부사는 실제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전라북도 진안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전동흘이다. 그가 평안도 철산부사로 자청하여 갔고 원한에 서린 원귀의 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장화홍련전으로 엮어진 것이다.

 

장화홍련전 이야기의 철산부사의 실제 주인공인 전동흘은 전북 진안 가림촌 태생이며 어머니가 쉰 살이 넘어서 마이산 신령께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담대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동흘 장군은 어머니가 마이산에 빌어 얻은 아들이었다

 

어렸을 때에 마을 근처에 월랑관이라는 큰집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아 귀신이 나타난다고 하여 대낮에도 그 앞을 지나다니기를 꺼려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누가 밤중에 저 빈집에 가서 닭이 울 때까지 있다 오면 대장으로 삼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전동흘은 기꺼이 자기가 가겠다며 밤중에 빈집으로 갔다. 그리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데 귀신들이 몰려오더니 장군님이 계신다며 절을 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는 조선 시대의 무인으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삼전도에서 왕이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에 이들을 호위하며 동행을 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돌아와 효종 2년인 1651년에 42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포도대장, 흥덕현감, 고부군수, 철산부사,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오이도 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때에는 강화돈대에서 사용할 불랑기라는 화포를 만들어 진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전주의 이상진, 익산의 소두산과 더불어 호남 3걸로 불리었다.

 

 진안 신기리에 있는 전동흘 장군 무덤

 

그는 지금 진안군 신기리에 묻혀 있다. 거기에 무덤이 있고 사당도 있다. 그의 산소에는 훈련대장가재전공묘(訓鍊大將嘉齋全公墓)라는 비석이 서 있고 비문이 있다. 가재는 전동흘의 호다.

 

가까운 곳에 광국재(光國齋)라는 그의 사당이 있다. 광국재라는 이름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광국장군(光國將軍)의 칭호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그도 광국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진안에 있는 진동흘 장군 사당

 

그에 대한 기록은 1865년 발간한 가재공실록(嘉齋公實錄)과 1968년에 발간한 광국장군 전동흘실기(光國將軍 全東屹實記)에 기록되어 있다.

 

전동흘 장군이 철산부사를 지내면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풀어준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장화홍련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본래 설화는 아무런 근거 없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설화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현재 진안군에는 전동흘 장군의 묘와 사당인 광국재, 신도비, 이산묘 등이 있으며 진안군에서는 신도비를 진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앞으로 전동흘 장군에 대한 자료가 더 발굴되고 정리되면 향토문화 자료로써의 가치가 더 커질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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