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활약한 비거(飛車)
문제: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정답: 미국의 라이트 형제
땡! 틀렸습니다.
틀리다니요. 라이트 형제 맞잖아요!
1903년 12월 17일, 미국 로스캐롤라이나 킬데빌 언덕에서 비행시간 12초, 거리 36.5m. 이건 확실한 기록입니다.
그래도 틀렸습니다. 세계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사람은 전라북도 김제 사람입니다. 자료를 핸드폰으로 보냈으니 잘 읽어 보세요
이런 희귀한 문제와 답을 보내온 사람은 누구일까? 척하면 삼천리 아닌가?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
그가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사용되었던 날아다니는 수레인 비거(飛車)는 라이트 형제의 기록보다 무려 300년이나 앞선다고 한다. 그리고 36m나 12초는 새 발의 피다. 우리나라의 비거는 10m를 날아올라 30리를 날아갔다고 한다. 그것도 사람을 태우고 다녔다고 한다.
때는 임진왜란 다음 해인 1593년, 장소는 경상도 진주성.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에 1차 진주성 공격에 실패한 왜군이 다음 해에 진주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할 때에 진주성에서 한지와 나무로 만든 글라이더 형태의 비행기가 떠올랐다. 그것을 비거(飛車), 또는 날틀이라 하였다. 날아다니는 수레다.
이 비거를 만든 사람은 전라도 김제 사람 정평구(鄭平九)였다.

정평구가 만든 날아다니는 수레였던 비거 상상도
근대 문학가였던 최남선은 정평구를 우리나라를 빛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이 비거에 대한 기록은 신경준의 저서 『여암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김제 사람이었던 정평구는 선조 26년인 1593년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포위되자 비거를 만들어 외부와 연락을 했으며 고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비거에 태워 30리 밖으로 탈출을 시켰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의 백과사전 격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0m의 높이로 30리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더욱이나 두 사람이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이야기를 담은 일본의 역사서 『왜사기(倭史記)』라는 책에 의하면 이 비차 때문에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는데 많은 곤욕을 겪었다고 한다. 비차는 외부와의 연락은 물론이고 화약과 염초를 한지에 싼 폭탄을 만들어 비차에 싣고 왜군에게 투하를 하였다고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이 없다는 것이다.
정평구는 본관은 동래요, 조선시대 무신이요 발명가다. 본명은 정유연이고 평구는 호다 1566년 3월에 김제 부량면 제월리에서 태어났다. 정평구는 과거에 응했으나 당시의 문란해진 과거제도로써는 급제가 어려워지자 무관시험을 보아 무관으로 급제를 하였다.
말직에 있던 정평구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수군에 두기 아깝다며 진주 병영의 별군관으로 보냈다고 한다.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에 있는 정평구의 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1592년 첫해에는 필사적인 항전으로 왜군을 물리쳤다. 그래서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진주성 싸움이 있다. 그러나 다음해인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한 왜군에 포위되어 화살과 식량이 바닥이 났다. 이때에 정평구가 비거를 만들어 식량과 화살을 실어왔다. 그리고 화약과 염초를 섞어 만든 화약을 비거에서 왜군에게 투하하였다.

진주성에서 할약한 비거와 당시의 진주성
이 비거는 사람의 머리털과 동아줄을 이용하여 나무와 한지로 만들었는데 이규경의 백과사전 책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전주부의 김시양에게 들은 비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비거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물에서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한 자벌레가 몸을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움직여 바람을 내면서 날개가 저절로 떠올라갔다. 이것은 붕새가 단숨에 삼천리를 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표현대로라면 틀림없는 비행기다.
그 후 비거를 향한 왜군들의 총공세로 총을 집중적으로 맞아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에 비거에 타고 있던 정평구는 크게 다쳐 부상을 당하였는데 그 길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계 최초의 비행기 발명가는 물론이요, 세계 최초의 비행사도 되었을 것이다. 정평구가 죽고 비거가 떠오르지 않자 왜군이 총공세를 펴서 그로부터 3일 후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정평구의 비거에 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를 않아서 뒷받침할만한 증거자료가 없다.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비차에 대한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평구에 대한 공로를 상소로 올렸으나 헛소문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현재 정평구가 만든 비차는 공군사관학교 국립과천과학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록 과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임진왜란 때에 진주성 싸움에서 “비거”라는 날아다니는 수레가 존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그 비거를 만든 사람이 전라북도 김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진주성 싸움에서 활약한 용장들 중에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고종후, 장윤, 양산숙 등 많은 사람들이 호남에서 원정을 온 의병장들이었다.
그중에는 조선의 3대 여류시인이었던 부안 매창의 애인이었던 김경회도 있고 장수 출신 논개도 있다.
이순신의 호남에 대한 평가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호남국가지보장(湖南國家之保障) 약무호남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 -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