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을 치르고 난 후 조선의 사회에서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왜놈이라고 무시했던 일본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왕과 조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의 굳건했던 유학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져 갔고 형식에 집착한 유교에 대한 학문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실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를 기점으로 삼는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은 얼마나 될까? 일본 측에서는 2만~3만이라 하고 조선에서는 10만~40만이라고 한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종이 되었고 일부는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갔다.
반대로 왜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조선인이 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형님,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을 아시지요?”
“김충선이 있지 않나.”
“그리고 또 누가 있지요?”
“여여문이라는 사람과 몇 명이 있지.”
“몇 명 정도가 아니라고 하네요. 만 명이 넘는다는데요.”
“뭐라고? 만 명이 넘는다고?”
항상 짭짤한 기사거리를 제공해 주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 전투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 귀화한 사람이 만 명이 넘는다니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럼 그들은 조선에 귀화하여 편안히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조선군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어떻게 자기편을 죽이는데 앞장을 설 수가 있는가? 이것이 군인의 길이요, 무사도 정신이다.
흔히 여자들을 두레박 팔자라고 한다. 두 씨와 예 씨, 그리고 박 씨를 남편으로 섬긴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자만 그러고 남자는 그렇지 않은가? 남자도 똑같다.
남자는 18세가 되면 군인으로 징병이 되어 50살이 되어야 풀려났다. 나라가 평안하면 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종군하면 된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러운 춘추전국 시대에 태어난 남자들은 자기 군주를 위해 종사하다가 전쟁에 지면 상대편 군사에 예편된다. 그리고 다시 전투에서 지면 또 다른 나라의 군대에 편성된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이나 해야 나이 50살이 되어 군대에서 제외가 될까?

임진왜란 첫 번째 싸움이었던 동래 전투
군인으로서의 남자의 길은 소속된 지휘관의 명을 받드는 것이다. 자기가 섬기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예로 알았다.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지휘관의 명에 따라 진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을 생각하면 왜군이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다시 왜군과 싸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무사의 길이요, 군인의 길인 것이다.
왜군이 조선에 와서 놀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인의 바른 예의였다. 과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었다.
저런 점잖은 나라 백성들을 이유도 없이 전쟁을 일으켜 죽여야 한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감동을 받은 사람이 왜군 사야가였던 김충선이었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부터 아무 잘못도 없는 점잖은 나라인 조선을 쳐들어간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조선으로 귀화한 대표적인 사람 김충선
그런데 조선에 와서 감동을 받은 것은 피난을 가는 행렬이었다. 허둥대지도 않고 침착하게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광경을 보고 놀랐다. 왜군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높은 도덕적인 사람들이 조선인이었다.
그는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조선에 온지 사흘 만에 부하들 3,000명 중 자기와 뜻을 같이 한 500명을 데리고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을 했다. 그리고 조선 군인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 임금은 그에게 김 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충선이라 지어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구 달성에서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을 하여 대구 달성에 머물렀다.
지금도 대구 달성에는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이 있다. 그가 남긴 "모하당 문집"에서 그는 "조선의 예의 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절 바른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귀순을 하였다."고 밝혔다.
왜군 귀순자 가운데 여여문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귀순하여 아동대(兒童隊)를 조직하여 젊은이들에게 검술과 전술을 가르쳤다. 여여문은 일본의 전략을 공개하였는데 소수의 인원으로 적을 유인하여 매복 지점까지 오면 일시에 공격을 하여 전투를 벌인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전술에 말려든 것이 칠천량 전투다. 이 전투는 이순신이 모함으로 잡혀가고 원균이 삼도수군절도사가 되어 치른 전투로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패전이요 가장 큰 패전이었다. 160여 척의 배가 겨우 12척 남고 다 부서졌다. 그 12척도 배설이 도망을하여 남은 배였다.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군으로 활약한 여여문
이때에 여여문의 일본 전술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패전을 면했을 것이었다. 여여문은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명나라 제독에게 배치된 후 적에 침투하여 적의 수급 4개를 가지고 귀환했는데 파귀라는 명나라 지휘관이 공을 가로채려고 그를 죽이고 말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귀순자 사백구가 있었다. 그는 가또 기요마사의 휘하의 군대로 조선에 와서 귀순을 한 뒤 김해부사 백사림의 휘하의 군사가 되었다. 함양에서 성이 함락되자 백사림 부사를 구출하여 탈출을 시킨 사람이다.
이순신 휘하에도 귀순자가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바다에 떠 있는 왜군들 중 적장 마다시를 확인해 준 사람이 준사였다. 적장 마다시의 수급을 높이 매달자 적이 놀라 달아나기도 하였다.
그밖에 조선에 귀순한 자 가운데는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 등의 이름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적힌 자만도 42회에 600여 명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귀순한 왜군들이 1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을 융숭히 대접하고 상당히 높은 벼슬까지 주었다.
전주에도 귀순한 왜병들이 있다.
전주시 우아동 왜망실은 왜망실 전투에서 패한 왜인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인데 그들에게 전주 김 씨의 성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이 귀화를 결정했던 조선의 품위와 정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귀화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백성이 될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난리였다. 그때의 교훈을 잘 새겨두었더라면 조선은 근대화된 강국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당파싸움에 빠져 나라를 송두리 채 빼앗겨버린 비극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이라고 그때와 다를 게 없다. 정치인들이 소속된 정당에 맹종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임진왜란과 경술국치를 또다시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