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인후동에 정언신로가 있다.
노송동과 인후동의 경계 지점에 있는 전주동초등학교 뒤의 서낭당이 5거리에서 동쪽으로 벋어나가 동부대로에 이어지는 길이다.
조금 가다 보면 견훤로가 나온다. 견훤로를 건너뛰어서 인후초등학교 옆을 지나 아중현대 아파트와 부영 2차 아파트를 사이를 지나간다. 아중중학교 부근 제일 아파트와 롯데 아파트를 지나서 동부대로에 접하는 길이다.

서낭당이 5거리에서 동부대로까지 이어지는 정언신로
정언신이 누구이기에 정언신로라는 도로 이름까지 생겼을까?
“정언신이 살아 있었으면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속에서 정언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전북 사람으로서는 정언신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언신을 모신 사당인 소양사(瀟楊祠)가 경상도 문경에 있을 정도로 훌륭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북 문경에 있는 정언신을 추모하기 위한 소양서원
정여립 모반 사건은 전주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타격이었다.
이 사건 이후 전주 사람들에게는 출세의 길이 막혔고 전주 출신은 기를 폈지 못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정철은 철저하게 동인을 궤멸시켰다. 티끌만 한 관련만 있어도 가차 없이 목을 날렸다. 요즘 검찰의 조국 수사는 새발의 피였다.
그중의 한 사람이 전주 출신 정언신(鄭彦信, 1527~1591)이었다.
그는 본관은 동래,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庵)이었다. 부친은 예조좌랑 정진이었고 모친은 양천 허 씨로 부윤 허확의 딸이었다.
정언신은 명종 21년인 1566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고 선조 4년에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가하였다.
후에 전라도 도사로 전주에 와서 선정을 베풀었으며 동부승지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대사헌 부제학이 되었다.
선조 16년에 여진족의 난이었던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참찬으로 함경도 도순찰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정여립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다만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것뿐이었다.
정철은 처음에는 정언신을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건드리지 못했다. 당시에 정언신은 명망 높은 우의정이었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을 조사하고 다스리는 책임자인 위관(委官)에 정언신이 발탁되었다. 그 정도로 정언신은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탐닉하고 있던 정철이 트집을 잡고 나섰다. 정언신은 정여립의 9촌간이니 공정한 수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언신은 미련 없이 위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우의정의 자리에서까지 물러났다.
그러자 정철이 위관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때부터 피를 부르는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기축옥사는 조선의 4번의 사회 중 나머지 3개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1,000여 명을 죽이는 참사를 빚어내었고 마침내 정언신마저 잡아들였다. 정철은 국문학사에서는 좋은 글을 남겼을망정 정치적으로는 나쁜 관리였다.
빌미는 정여립과 동래 정 씨 9촌간이었고 정여립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현명하지 못했던 선조는 정언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철의 말을 따랐다.
정언신은 의금부에 잡혀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함경도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었다.
정언신의 아들 정율은 아버지의 억울한 꼴을 보고 식음을 전폐한 후 피를 토하고 죽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반역에 연루될까 무서워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억울함을 알고 있는 이항복은 문상을 하고 정율의 관속에 시를 한 편 넣어주었다. 후에 정율의 아들이 이장을 할 때에 발견되었다.
이 시를 백사의 만인시(白沙 挽人詩)라 한다. 이 시를 보면 당시의 살벌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입이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내려도 감히 울지 못하네
베개를 어루만지면서 남이 볼까 두려워하고
소리를 삼키며 남몰래 눈물만 훌쩍이네.
그 누가 장차 날 선 칼날로
굽이굽이 맺힌 마음의 고통을 잘라내 줄까?”
그가 훌륭한 관리였다는 것은 함경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에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미를 비축하였으며 함경도도순찰사로 있을 때에 휘하에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지키는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언신을 훌륭한 상관으로 평가하였다. 결코 정언신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언신이 함경도 도순찰사로 있을 당시의 함경도 상황
이순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정언신을 면회를 하려 할 때에 주변에서 말렸다. 조그마한 꼬투리만 잡혀도 역적으로 몰리는 판이니 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정언신을 면회를 갔다. 옥에 이르러 보니 옥리들이 술을 마시며 희덕거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야단을 쳤다.
“일국의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풍악 하듯이 그렇게 근무를 해서야 되겠는가?”
이순신의 말에 옥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언신이 죽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언신이 살아 있었더라면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올곧은 사람이었고 인재를 보는 눈이 있어서 나라의 일꾼을 많이 찾아내어 천거를 했던 사람이었다.
전라도 도사 시절 많은 선정을 베풀었던 정언신의 이름을 붙인 ‘정언신로’를 걸으면서 정언신은 누구이며 이 도로의 이름을 왜 정언신로라 했을까 생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산책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