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망모당(望慕堂)에 깃들어 있는 표옹 송영구 이야기
중국의 황제의 칙사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손님이었다.
그 칙사에게는 별의별 선물을 주면서 환심을 사려했다. 그러나 조선은 스승의 나라인데 무엇을 받아가겠느냐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간 칙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다.
그는 누구이며 그가 말하는 스승은 누구인가?
“형님, 송영구(宋英耈)와 주지번(朱之蕃)의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잠잠하니 오늘은 망모당(望慕堂)에 가봅시다.”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게으른 나를 일으켜 세워 차에 태워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
그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님이다.
망모당은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장암마을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이었던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耈)가 지은 것이다.
그는 선조 40년인 1607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 이곳에 ‘바라보며 사모한다’는 뜻의 망모당(望慕堂)을 짓고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선영의 무덤들이 있는 우산(紆山)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망모당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건물이며 앞 부분의 네 개의 추초석은 높이 1m 정도의 돌로 괴었고 후면의 주초는 얉게 지반을 다져서 계단식으로 건립하였다. 기둥 위에 첨차를 놓아 기둥이나 처마의 하중을 직접 받게 하였으며 받침기둥을 닭벼슬처럼 계자각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 걸려 있는 망모당(望慕堂) 글씨는 중국 명나라 문장가인 주지번이 쓴 글씨다.

익산 왕궁에 있는 표옹 송영구가 지은 망모당
송영구는 1556년 익산 왕궁에서 태어났다. 선조 17년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주서와 사과를 역임하였다. 그 후 사간원 정원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에 성절사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599년에 복직하여 충청도도사, 지평을 거쳐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 사관원 사간, 청풍군수를 지냈다. 선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광해 4년인 1612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이듬해인 1613년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 이이첨이 권력을 장악하고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여 파직을 당하였다.

망모당의 내부에 걸려 있는 송영구 초상화와 편액들
명나라 주지번과의 만남은 송영구가 1593년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성절사 서장관의 직분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에 이루어졌다.
그때에 주지번은 조선 사신의 방에 불을 때주는 청년이었다. 청년이 불을 지피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읊는 것이었다.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이었다. 송영구는 그를 불러 그가 과거를 보려고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듣고 조선에서의 과거 준비와 과거 시험 볼 때의 답안 작성법을 알려주고 몇 권의 책을 주며 돈까지 주었다. 이 청년이 바로 주지번이었던 것이다.
주지번은 2년 뒤인 1595년 명나라의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주지번은 황제에게 조선 사신으로 갈 것을 청하여 1606년에 조선에 오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오자마자 송영구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때의 송영구는 종6품인 평양 대동역참의 찰방으로 좌천된 상태여서 조정에서는 송영구가 죽었다고 둘러 부쳤다.
그러나 주지번은 죽었어도 가보아야 한다며 단말마로 익산으로 향하였다. 전주 객사에 머물면서 지금 걸려 있는 “풍패지관(灃沛之官)”의 글씨를 써주었다. 그리고 망모당에 이르러 “망모당(望慕堂)”이라는 글씨도 써주었다.
송영구와 주지번의 만남은 송영구가 두 번째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에 이루어져 회포를 풀었다.

표옹 송영구의 치적을 새긴 신도비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 사평에서 태어나 송영구의 가르침을 받고 장원급제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림원 수찬으로 시작하여 예부와 이부의 우시랑을 지냈다. 사후에 예부 상서로 추증된 사람이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명나라에서 초굉, 황휘와 함께 학사 3인에 드는 사람이었다.
주지번은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역대 중국의 시문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필사하여 첩 형식으로 꾸민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을 선조와 원접사 유근에게 주었다. 이 천고최성첩은 조선의 화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그는 성균관 직강이었던 허균과도 교우하였는데 허균의 소개로 누이동생인 허난설헌 시집인 『난설헌집』을 읽고 이를 중국의 문단에 소개하여 허난설헌을 유명시인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주지번은 조선에 다녀온 후 『봉사조선고(奉使朝鮮稿)』라는 책을 저술하여 그가 조선에서 보고 행하였던 것을 기록하였다.
주지번은 망모당(望慕堂), 풍패지관(灃沛之官) 외에도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글씨와 경포대 제일강산(第一江山)의 편액도 글씨를 써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송영구와 주지번의 이야기는 잠깐 만난 스승과 제자의 정이 만 리길 국경을 넘고 시대를 넘어서 만인에게 감동을 주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오래도록 남이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