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립을 도운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작성일 : 2023-05-06 19:34 수정일 : 2023-05-10 08:56 작성자 : 이용만 기자

 

 

 

 

"혹시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그것까지는 못 알아보았는데"

"이달에는 특별한 인물이 선정되었습니다. 일본인이에요."

"일본인?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라고? 그거 화제거리네."

"자료 보내 드릴 게 참고하세요."

재야 인문 사학자 천판욱 선생이다.  

 

국가보훈처는 매달 ‘이달의 독립 운동가’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그런데 이번 5월에 선정된 사람은 일본인이다. 놀라운 일이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하여 조선군이 되어 조선을 도운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일본인은 드물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가네코 후미코는 군인도 아니요 나이 어린 처녀였다. 그는 일본 천황을 죽이려고까지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했다.

더불어 후미코를 적극적으로 변호했으며 후미코의 유해를 거두어 한국으로 운구하였고 재일동포들을 위해 힘썼던 ‘일본의 쉰들러’로 불리는 후세 다쓰지 또한 한국의 독립을 도운 사람이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도대체 후미코는 왜 조국인 일본을 등지고 한국의 독립을 도왔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유가 얽혀 있다.

 

후미코는 일본 가나가와현의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경찰을 하면서 술과 도박과 처첩을 두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거기에 어머니마저 이성관계가 좋지 않아 후미코는 출생신고마저 되지 않은 사생아가 되었다. 그래서 소학교마저 입학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일본 국민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미코는 당시에 번지던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나키스트는 어떠한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고 사회 혁명을 통해 지배자가 없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사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후미코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9살 때에 고모가 살고 있던 충청북도 청주에 맡겨진 후부터다. 고모부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근무를 했기 때문이다. 사위의 집에 살고 있던 할머니마저 후미코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아 학대를 받았다. 호적은 겨우 외할아버지의 딸로 입적을 했으나 고모와 고모부, 할머니 모두가 후미코를 식모처럼 부려 먹고 학대를 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조선인 마을에서는 후미코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후미코가 한국에 호감을 갖게 된 동가가 아닌가 한다.

 

후미코는 1919년 삼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일본이 강제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선의 독립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조선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가족들의 복잡한 관계로 인하여 가정을 떠나 도쿄로 상경했다. 그는 신문팔이와 노점상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때에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했고 러시아혁명에 대한 책을 읽고 사회주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1921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이던 이와사키 어묵집에 종업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22년에 한국의 박열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거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열이 조직한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 후 ‘흑우회’에서 '대담한 조선인'이라는 잡지도 발간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폭탄을 입수하자는 박열의 주장에 대해 상반된 주장으로 갈등이 커져 흑우회가 해산되고 말았다.

 

1923년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는 핑계로 조선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박열이 체포되면서 후미코도 함께 검거되었다. 수사 도중 폭탄 입수에 대한 사실이 밝혀져 두 사람은 기소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1927년 1월 27일, 일본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동아일보가 옥중의 박열과 후미코의 사진을 공개했는데 박열의 품에 안겨 책을 보고 있는 후미코의 모습이 너무도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공개되자 논란이 일었다. 죄인으로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담당 판사인 다테마스 가이세이였는데 두 사람을 회유하려고 찍은 사진이라 하였다. 다테마스 가이세이 판사는 즉시 해임되고 당시 와카스키 레이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박열과 후미코의 옥중 사진

 

도쿄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박열은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 차림으로 나타나서 ‘나는 박열이다’라고 외쳤고 후미코는 조선 여자들의 차림인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나타나서 ‘내 이름은 박문자다’라고 말했다.

폭탄의 용도는 천황이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때에 박열은 ‘재판은 연극이다’라고 외쳤고 후미코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천황의 배려로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어 감옥생활을 하였다. 두 사람은 옥중결혼을 하였다.

 

후미코는 스물세 살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자살을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열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자살을 할 이유가 없었다.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 때문에 박열의 형인 박정식이 유해를 인수받아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매장을 하였다.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후미코의 무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뒤에 광복 후에 석방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76년 3월에 야마나시현 마키오카 소마구치에 있는 후미코의 생가 터에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3년 박열의 생가 터에 박열의 기념관을 세우면서 후미코의 묘도 이곳으로 옮겨왔다. 후미코가 남긴 원고는 구리하라 가즈오가 정리하여 시집과 자서전으로 출간되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2018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는 2016년 ‘박열’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가네코 후미코.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을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진정한 한국인이었고 애국자였던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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