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이 하루 종일 벌였던 독재정권 항쟁
5월 27일.
이날은 전라북도 사람들이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날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에 전북에서는 무엇을 했느냐고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전북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북에서도 나름대로 항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광주에서처럼 대대적으로 항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군과 경찰이 철통같이 방어를 하고 있었기에 소요가 크게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중 하나가 전주신흥고등학교의 5‧27 민주화운동이다.
당시에 신흥학교 교감으로 직접 일을 겪었던 정옥동 장로의 증언을 빌리면 5‧27 신흥학교 민주화운동은 이러했다.
5‧27 신흥학교 민주화 운동의 발발 동기는 광주에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전북에서 젊은 대학생에 대한 검문과 감시가 심해졌다.
당시에 신흥학교에 교생으로 와 있던 대학생 한 명이 남원 고향에 다녀오다가 남원역에서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군 공수부대원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 맞아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계엄군의 난폭함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신흥학교에는 광주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다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광주의 실상이 전해졌고 학생들은 울분과 비탄에 빠져있었다.
군 당국과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다. 학교에는 위조된 시국정보가 뿌려졌고 학생들의 동태를 매일매일 도교육위원회(당시의 도교육청의 명칭)에 보고하도록 했다.
광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통하여 많은 광주의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흥학교 학생들은 동료학생들이 죽어 가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높아져갔다.
5월 26일, 기독학생을 중심으로 몇몇 학생들이 전주에서 항쟁을 일으키기로 결의를 하였다. 이들은 비밀이 샐까 두려워 집에도 가지 않고 밤을 새우고 학교로 등교를 하였다.
5월 27일, 학교에는 비상이 내렸다. 경찰에서 학생 소요에 대비하라는 통보가 오고 새벽에 선생님들을 소집하여 소요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당시에 신흥학교에는 경찰에 매수된 첩보원들이 교사도 있었고 학생도 있었다. 이들에 의해 동태가 경찰과 계엄군에 수시로 통보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침 일찍부터 교문 앞에 나와 등교하는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런 낌새를 눈치챌 수 없었다. 수업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건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갑자기 정찰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학교 위를 저공비행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학생들을 흥분시켰다.
학생들은 찬송가 388장, ‘비바람이 칠 때와’를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 많은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들이 가까스로 밖으로 못 나가도록 말리고 있었다. 1교시가 시작될 무렵 교련수업을 준비하고 있던 1학년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나왔다. 이를 본 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가자!”
이와 동시에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준비한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군부독재 물러나라!”
“전두환은 퇴각하라!”

1980년 5월 27일, 전주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당시의 광경
어느새 학교 주변은 군대와 경찰에 의해 완전 포위가 되어 있었다. 최루탄을 쏘는 페퍼포그 대형 차량이 교문 앞에 버티고 있었고, 화염방사기를 착용한 군인들과 착검을 한 군인들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뒤에는 진압봉을 든 경찰들이 또 있었다. 4중으로 포위를 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만 하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뿐만 아니라 운동장 위에는 기관총을 정착한 정찰기가 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든 학생들을 보호해야 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 사이에서 자제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은 ‘군부독재 물러가라!’ 외치고 선생님들은 ‘죽음의 길로 가지 말라!’고 외쳤다.
다가공원 정상에 차려놓은 지휘소에서는 학교를 환히 내려다보면서 군과 경찰을 지휘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됨을 알자 운동장을 S자로 돌면서 군부독재 규탄을 외치고 있었다. 일부학생들은 지쳐서 운동장 한쪽 그늘에서 구국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진압군이 학교 안으로 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교장은 서울 출장 중이었고 전옥동 교감이 총책을 맡고 있었다. 군 지휘소에서는 교감에게 군대를 학교 안으로 진입시키겠다고 통보했다. 교감은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항변을 했다.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군대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사정도 했다.
학생들은 운동장을 돌면서 구호를 외치며 항쟁을 하고 있었고 군경 지휘소에서는 진압군을 학교 안으로 진입시키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어떻게 하든지 학생들의 희생은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버티었다.

1980년 민주화운동을 벌였던 신흥고등학교 운동장
군경 지휘소에서 그러면 학생들을 귀가시키라고 요구했다.
학교에서는 귀가 도중 학생들을 구속하거나 구타하면 전주 시민들이 나서게 될 것이니 귀가를 보장하라고 제의했다. 그때에는 이러한 광경을 보기 위하여 전주천 주변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군이나 경찰이 귀가하는 학생들을 연행하거나 폭행할 경우 시민들의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학생들의 귀가를 보장받은 뒤부터 학생들 귀가작전이 시작되었다.
1학년부터 한 반씩 귀가를 시킬 때에 3학년 주동학생들을 끼워서 귀가시켰다. 남은 3학년 학생들은 운동장을 말끔히 정리하고 귀가하였다.
그날 주동학생들은 이미 노출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검거 대상일 것을 예상해 몰래 학교 뒤쪽 기전학교 쪽으로 빠져나가 냇가를 타고 귀가를 시켰다.
그날의 항거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학교는 망신창이가 되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가 이상해져 버렸다. 지금까지 정의롭던 선생님들이 군부독재 편으로 비치게 되었다.
“선생님, 평소에 저희들에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해놓고 그날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선생님은 위선자입니다.”
학생들의 항변에 할 말이 없어졌다. 너희들은 죽음으로 내몰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선생님들의 괴로운 심정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학생들에 대한 징계도 문제였다. 경찰에서는 주동자를 색출하여 통보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학생은 학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맞섰다. 그리고 3명을 정학처분을 내렸다. 학생 징계에 대한 당국의 요구가 계속되었지만 거절하였다.

전주신흥고등학교 앞에 설치된 '삼일독립운동과 신흥학교' 안내판
신흥학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애국운동을 실천해 온 학교다. 그러기에 살벌했던 군부시절에도 민주화 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와 겨레를 위한 애국애족의 기상은 학교를 감싸고 있는 전주를 대표하는 완산 줄기를 따라 계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