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소탕작전에서 산화한 소병민 중령
전주시청 부근 전주고등학교 교문 옆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높다랗게 서 있는 동상은 군인이다. 전주고등학교 출신 서병민 중령의 동상인데 도민들이 애국 애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소병민 중령(1930. 11. 25~1968. 11. 03)은 완주군 용진면에서 태어나 전주북중학교와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1952년 육군보병학교를 나와 갑종 16기 육군 장교로 임관되어 한국전쟁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1968년 11월 3일 충남 서산지구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와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총탄을 맞아 장렬히 산화하였다. 향년 39세였다. 정부에서는 1968년 11월 6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소병민 중령의 장렬한 죽음을 기리고 그 뜻을 받들어 나라 사랑의 귀감으로 삼고자 전라북도 도민의 성금을 모아 1970년 11월 3일 전주고등학교 교정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소병민 중령 동상은 2015년 5월 14일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고 전북지구 기무부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전주고등학교에 서있는 소병민 중령 동상
1968년 11월 3일, 32사단 방첩대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소병민 소령은 ‘거동이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결과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소병민 소령은 5시간의 수색 작전 끝에 충남 서산군 운산면 태봉리 야산에서 은거 중인 무장간첩 1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자수를 권고하면서 접근해 갔다. 그러다가 적이 쏜 총탄을 맞고 전사하게 되었다.
그는 전사 후에 한 계급 특진하여 중령으로 예우 받게 되었다.
나머지 무장공비들은 후에 제28대 육군 참모총장의 자리에 오른 당시의 이진삼 소령이 포복으로 접근하여 수류탄을 던져 사살하게 되었다.
소병민 중령이 서해안 무장공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던 1968년에는 무장공비 침투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던 해였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무장공비 30명이 서울 시내까지 침투를 하였으며 8월 21일에는 간첩선을 타고 14명이 서귀포에까지 침투를 하였다.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삼척 울진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해왔다.
1968년 10월 30일에 무장공비 2개조 30명이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에 침투하였다.
11월 1일에는 2차 침입군 2개조 30명이 울진군 북면 고포해안으로 침투하였다.
11월 2일에는 3차로 4개조 60명이 삼척 원덕면 월촌리 고포해안으로 침투하였다.
무장공비들은 마을에 침투하여 주민들을 모아놓고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고 노동당과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했으며 반항하는 사람들을 대검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신고하면 모조리 죽인다고 위협했다.
이로부터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반공소년 이승복이 만들어졌다. 이승복의 가정은 모두 사살되어 누구도 본 사람이 없었는데 모 신문사 기자가 이승복이 “공산당은 싫어요!” 하면서 죽었다고 기사를 쓰는 바람에 이승복은 반공소년의 표상이 되었고 각 학교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사이에 이승복의 동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워지게 되었다.
울진 삼척지구에서는 그로부터 약 2개월에 걸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벌어져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침투사건이었다.
이어서 11월 3일에는 충남 서산으로 무장공비가 침투를 한 것이다.
11월 8일에는 동부전선으로 무장공비 5명이 침투하였는데 모두 사살되었다.
1968년 한 해에만 156명의 무장공비가 사살되었다.
여러 곳에서의 무장공비 남한 침투작전 실패로 북한은 무장공비 침투를 자제하게 되었고 무장공비 침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전주고등학교에서는 매년 11월 3일에 소병민 중령의 추모행사를 관계 기관과 도민들 합동으로 거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