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 충경로는 어떻게 붙여진 이름일까

이정란 장군의 시호 ‘충경’에서 따온 말

작성일 : 2023-06-19 06:24 수정일 : 2023-06-19 08:49 작성자 : 이용만 기자

 

 

전주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팔달로이고 또 하나는 충경로이다.

충경로는 흔히 관통로라고 부르고 동서라고도 부른다. 동서를 관통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동쪽은 병무청오거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은 다가교까지 이어지는 전주 시내의 구 도심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중심도로다.

 

사실 충경로보다는 관통로나 동서로가 부르기도 쉽고 의미도 가깝다. 그런데 왜 굳이 충경로라고 했을까?

 

전주 시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충경로 거리

 

충경로는 어디에서 따온 이름일까?

임진왜란 때에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왜군은 정유재란 때에는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호남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진주성 싸움에서 이기고 남원을 공격하여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전주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왜군이 금산을 거쳐 진안을 지나 전주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주부윤 박경신은 왜적이 전주를 침입한다는 말을 듣고 싸움도 하기 전에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나버렸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사태 속에서 전주를 사수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정란 장군이다. 그의 시호가 충경이다. 충경로는 이정란 장군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남고산성 앞에 서있는 이정란 장군 사당인 충경사 

 

이정란 장군은 어떤 사람인가?

이정란(李廷鸞) 장군은 선조 원년인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해미현감, 개성도사를 역임했다.

선조 22년인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이정란이 정여립과 같은 전주 사람이라는 트집을 잡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와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정란은 정여립과 인근에 살았지만 처음부터 가까이 지내지 않고 멀리했다. 그러한 관계로 정여립과 조금만 교제가 있어도 목숨을 잃었는데 벼슬만 내놓고 무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록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전주를 지켜야 한다고 의병을 일으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전주를 지켰다. 전주를 지킴으로써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수원부사, 공주목사 등을 역임했지만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전주성이 위급해지자 조정에서는 이정란을 삼도소모사 겸 전주부윤으로 임명하였다.

이때에 이정란은 전주를 향해 쳐들어오는 왜군을 수차례 물리쳐 전주를 수호하여 끝까지 전주를 지켜냈다.

 

왜군이 금산과 진안을 거쳐 곰치재인 웅치 전투에서 마저 승리를 하고 의기양양하게 소양을 거쳐 전주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정란 장군은 웅치싸움에 참여했지만 여기에서 적을 막지 못한 한을 마지막 싸움이었던 안덕원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전주를 수호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전주에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5곳에 보존하고 있었으나 4곳의 실록을 잃고 유일하게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만이 보존이 되었는데 전주를 사수한 이정란 장군의 몫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정란은 나라로부터 충경공(忠景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남고선성 입구에 이정란 장군을 기리는 충경사(忠景祠)가 있다.

전주시내의 도로 명 충경로(忠景路)는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다.

 

충경로라는 이름이 다소 딱딱하고 친근감이 없는 단어라 해도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제대로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이용만 기자 ym60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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